이승만 초기 사상에 나타난 서구중심주의를 읽고

in #kr7 years ago

이승만은 근대 태동기의 유명한 지식인이었다. 당시에 그는 서구의 많은 부분을 상대적 으로 열등한 국가인 조선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의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인정하지 않은 반면에 서양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을 조선이 필수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 다.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했을 때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 대한 의견은 동시대의 지식인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대부분의 문명개화론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맹목적으로 선진국의 문화를 수용하자고 주장했던 저명한 인사 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이승만의 독특한 특징은 서구 기독교 문명을 다른 지식인들보다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 기독교 문명을 인간의 보편성을 띄는 발전경로로 보 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조선에 서구화를 가속화시킨 인물이고, 전통 문화에 대해 회의 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훗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적·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야기했다. 이 러한 그의 초기 사상은 조선 후기의 세도 정치가 보여준 폐단, 근대 태동기에 급변하는 세계 정 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조선을 본 그의 답답함이 그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입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는 중국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그 당시에 이미 유럽의 강국들에 패배한 전력이 있다. 그러한 패전 소식을 들은 지식인들은 중화 주의 사상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보다 더 강한 국가가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격이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일수호조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교류를 시작한 조선을 어떤 방향 으로 개화시켜야 할지 많은 지식인들의 의견이 갈렸다. 개화의 방향성과 속도에 대한 의견들은 정말 다양했다. 이승만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꾸준히 서구중심주의를 주장했다. 서구의 문명만이 최고라고 여겼고, 한국이 서구화를 통해 서양 문명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는 조선이 한국 문명화에 기여할 요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화가 필요하다고 논했다. 조선에 대한 실망감과 답답함 때문에 그는 조선을 절대적인 열등국으로 정의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다른 강대국들과 동화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그 결과 이승만은 자신을 서구의 입 장에서 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문명화가 없다면 강대국 반열에 합류할 수 없다고 생 각했고, 심지어 외국이 식민지를 만들고, 피지배인들을 착취하는 행위는 오로지 비문명국의 책임 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는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것은 당시 일본의 악위적 행위보 다 대한 제국의 부족함에 원인을 돌린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보편적 도덕이라고 주장 하였고, 제국주의 국제질서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지나치게 당연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초기 저술들과 발언들을 살펴보면, 주장들 간 모순되는 측면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제국주의의 논리, 국제법 이면에 숨겨진 강대국들의 권력·정치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국주의 사상과 국제법의 긍정적인 측면만 옹호하였고, 평등을 주장하면서 정작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위협하는 당대 상황은 외면했다. 국제정 치와 국제법에 정통한 그는 대한 제국을 외교 강국으로 만들어서 성장 중에는 외국에 침략당하지 않게 보호할 생각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차례로 국가의 권리들을 빼앗길 때, 이승만은 한국을 도 울 나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중 거중 조정까지 체결한 미국 은 한국이 주권을 빼앗기기 전에 어떠한 행동이든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오히 려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의 대한 제국 침략을 인정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전시중립론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고, 당대 열강들의 문명을 여과 과정 없 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순진한 행위를 한 셈이다.

일련의 문명개화론자로서의 이승만의 초기 사상을 분석하면, 그는 정말로 서구 열강들을 신봉하는 신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와 미국을 절대화했고, 그 두 가지 요소 없이는 한국 이 개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초기에 그러한 태도가 유지되었을 때는 자신을 서구 문명국의 입 장에 눈을 맞추는데 불과했다. 경술국치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한국을 착취하고 나서는 그의 강대국들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각해졌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유엔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보낸 결과 그는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당했다. 이승만은 탄핵당한 이후에도 꾸준히 외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 썼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기엔 모호한 점들이 있다.

혼란의 시대였던 대한 제 국 시기에 계몽 운동과 외교 활동을 했던 이승만은 자신의 초기 사상을 올바르게 발전시키지 못 했고, 결국 그는 많은 논란거리만 후세에 남겼을 뿐이다. 그는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싸움과 조선 의 현실을 정확히 관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암울했던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 일관 성 있게 서양의 우월성을 주장할 뿐이었다. 그는 항상 가슴 속 깊은 곳에 열등감을 숨기고 있었 던 것이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기간과 국권 침탈기는 같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의 서구 중심주의가 미국 중심주의로 바뀌는 과정을 거쳤다. 그가 유학을 마친 시기에 그의 초기 사상에 드러났던 서구중심주의는 이미 미국만을 숭상하는 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을 할 때 도, 한국이 해방된 후에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할 때도 미국과 그는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이승만은 조선이 독립된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건국을 주도했으며 남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서양의 사상을 조선에 전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독립 운동 노선과 그의 행동 속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친미 사상은 논란의 여지 를 남긴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초기 사상은 대한민국의 틀을 만들 때 기여를 했지만, 그와 동 시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키우는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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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우리 동포를 총으로 쏴죽인 마피아였고
임시정부로 가야할 군자금을 가로챈 사기꾼이었습니다.
6.25때 녹음된 방송으로 서울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자기 혼자 서울을 벗어나며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서울시민들은 도망가려고해도 한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죠.
이때 많은 서울 시민들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징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국군 공병은 다리를 폭파했다는 불명예를 안았고 공병 최고의 장군도 별 2개 그러니까 2성장군밖에 못 올라가는 치욕을 당해야했습니다.
60년 넘게 지나도 공병 장군은 3성을 달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승만은 서구열강을 숭배한 게 아니라 돈과 자기자신의 욕망을 숭배했습니다.
백범일지 읽어보시면 임시정부가 얼마나 궁핍했었는지 아실 수 있을겁니다.
미국의 동포들이 모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지 않고 제 주머니로 넣은 사람이 바로 이승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