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단오 풍정>

in #kr7 years ago

단오 풍정

봄꽃이 지고 푸르른 새 잎이 눈부시게 싱그러운 음력 5월 5일은 농경시대로부터 즐겨온 단오절이다. 세시풍속으로 1년 24절기로 구분하여 설날, 추석절과 더불어 큰 명절로 지내 왔다. 음양철학 상 기수(홀수)가 겹쳐서 양기가 왕성한 날이 되어 다가올 여름의 질병과 재앙을 방지하고 인생에 생기와 활력을 줄 때라고 여겼다. 이 날 만큼은 농사 일을 접고 모두 모여 새 옷을 입고, 먹고, 마신다. 남자들은 힘 겨루기 씨름대회가 열리고 여인네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 감고 뒤 울 안에 그네를 매어 그네뛰기를 하며 즐겼다. 유교 사회였던 한국, 일본, 중국 등은 나라마다 고유의 전통이 있었지만 단오는 동양권 공통의 큰 축제다.

1930년대 광화문(세종로) 동아일보사 뒤의 우리 집에서 골목을 돌아 나오면 청계천이 흘렀다. 멀리 인왕산, 삼각산, 북한산의 계곡물이 모여 서울의 복판을 가로질러 큰 바위를 휘돌아가며 구비치는 것이 마치 시골 마을 개울 가의 운치처럼 평화로움이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수도 시설이 없고 마당 한 쪽에 펌프가 있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서울 한복판임에도 그 때는 그랬다. 나는 낮 한 때 행랑어멈이 빨래하러 광주리 이고 청계천으로 나가면 치맛자락 붙잡고 졸졸 따라 나섰다. 옆에서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에 물장구 치며 발 담그고 놀던 유일한 놀이터였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위에 척척 걸쳐 놓은 광목 호청이 햇빛에 흰색으로 반사되던 그 눈부심이 그리워진다.

어머님은 나의 단오빔으로 작년에 입던 숙고사 노란 저고리, 분홍 치마를 봄부터 정성껏 홍두깨로 반듯하게 두들겨 펴 다려 만들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설렜는지 밤에도 잠자리 옆에 개 놓고야 잠이 들었다. 새 옷을 입을라치면 늘 다소곳이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늘 어머님께 꾸중 들으면서도 즐거웠다. 나는 하나뿐인 고명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 같다.

떡으로는 증편(술떡)을 만드셨다. 멥쌀가루를 막걸리에 반죽하여 치대어 놓았다가 발효시키고 넓은 채반에 보를 깔고 손 두 개만큼 펼치고 적당하게 가루 위에 석이버섯을 가늘게 썰어 잎이라 하고 대추를 꽃이라 하며 잣으로 무늬 놓아 가마솥에서 푹신하게 쪄 낸다. 익어도 그대로 꽃밭같이 무늬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즐겁게 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손님 오시는 날에는 쑥떡, 어채, 준치만두, 앵두화채 등 단오절 잔칫상이 푸짐했다. 증편은 아버님이 좋아하셨고 후에 남편도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니 막걸리가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요즘은 떡 문화가 발달되어 어느 때나 골라 먹을 수 있지만 그 절기에 해 먹는 떡이 별미와 운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단오절에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은 창포 잎을 삶아서 머리 감는 일이다. 신윤복 그림 <단오풍정>에 보면 계곡 물가에서 뽀얀 두 어깨를 내놓고 나무 그늘에서 신록처럼 신선하게 윤기 흐르는 긴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매만지는 요염한 그 자태는 정말 아름답다. 무엇인가 먹거리를 이고 오는 여인, 그네 뛰느라 바람에 치마가 휘날려서 속곳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처녀, 그 여인들을 바위 틈에서 숨어 훔쳐보는 동자스님들을 보면 단오절의 흥과 정취가 느껴진다. 그 시대에는 사대부 집안 여인이나 여염집 아낙들은 내외법이 있어 집 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날은 여인들도 마음 놓고 청계천, 북쪽의 삼청공원,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의 냇가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어머님은 긴 머리를 창포 잎으로 감으시면 전통 조선 여인 모습으로 쪽을 찌고 은비녀를 꽂고 계셨다. 한복을 입으시면 갸름하고 단아한 얼굴이 너무나 잘 어울리고 아름다우셨다. 나도 커서 저렇게 예쁘게 빗어야지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짧은 단발머리를 했다. 그 당시 개화바람이 불어 처녀들은 단발머리가 유행하였고 어머니들도 신여성이라고 멋있게 빗어 올렸다. 나는 한참을 설득하여 중학교 입학식 때는 어머니도 머리를 자르고 예쁘게 틀어 올리고 오셨다.

시모님은 89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쪽을 지고 사셨다. 단오절이면 창포물로 늘 머리를 감아드렸다. 아침마다 언제부터인가 동백기름을 구할 수 없어 베이비 오일을 바르시고 가르마를 코 끝에서부터 반듯하게 올리시며 단정하게 몸단장을 하셨다. 그 분이 80년간 매일 가르마 타신 분홍빛 상아 비치개가 연필 길이만 하던 것이 반으로 닳아버렸다. 나에게는 시모님이 물려주신 은비녀, 옥비녀가 있다. 가끔 꺼내보며 한 번 나도 머리 길러 옛 조신한 조선 여인이 되어 멋부려 볼까 하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두 어머님 곁에서 반세기 동안 단옷날 어김없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서 그랬던가 나의 머리숱과 결이 세월의 풍상으로 백발이 되었지만 그냥 그대로 아직 볼만한 것은 두 분과의 세월의 무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작년 단오절에 못 다 보낸 전통 부채에 예쁜 들꽃을 올려 한껏 멋을 부려 보내야지. 시원한 바람과 꽃 향기에 취해 기뻐하는 벗님들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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