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22-完)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22-完)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가 일군 대제국은 분열의 길로 치달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체의 음주가무를 금지한 것은 기본이었다. 왕은 군중의 말과 노새의 갈기를 모두 잘라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게 하고는, 그것만으로는 정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제일 윗돌들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마구잡이로 인간사냥에 나섰다.
슬픔이 가져온 광기에 사로잡힌 그가 얼마나 난폭하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는지는 콧사이오이 민족이 당한 불행한 봉변이 생생히 웅변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인을 위한 제의라면서 성인 남자들을 깡그리 죽여 없앴다.
알렉산드로스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어느 정도 삭이자 바빌론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바다로 나갔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올라와 왕과 다시 합류한 네아르코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의 바빌론 행을 강하게 만류했다. 더군다나 점을 칠 때마다 불길한 점괘가 나왔으므로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입성을 포기하고 시 외곽의 임시 행궁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상서롭지 않은 신탁과 예언들을 되돌리려는 의도에서 다양한 제의를 펼쳤는데 이로 말미암아 왕이 머물고 있던 곳은 신관과 점쟁이들로 북적북적했다.
바빌론 바깥에서도 주연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네아르코스를 위한 술자리를 연 왕은 잠깐 목욕을 하고는 이번에는 메디오스가 청한 주연을 즐기러 갔다. 그는 이튿날에도 술을 마셨고 그러자 헤파이스티온을 덮친 것과 비슷한 증상이 왕에게도 찾아왔다. 왕은 심각한 고열에 시달렸고, 수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헛소리를 내뱉었다.
왕은 다이시오스 달 18일부터 앓기 시작해 그달 30일 저녁에 죽었다. 뜨거운 목욕도, 신에게의 기도도, 병사들의 간절한 응원도 알렉산드로스를 살리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유명을 달리한 날짜를 현대의 역법에 입각해 계산하면 그는 서력으로 기원전 323년 6월 15일에 사망한 셈이 된다.
당시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지금과 비교해 덜 건조했다. 따라서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가 많았다. 후세의 의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말라리아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가 독살설을 부정하고 있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모기에 물려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더더욱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이 독살당한 시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깨끗했다는 사실을 독살설에 대한 반박 근거로 제시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나라 안팎으로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칼과 창도, 도끼와 화살도 그의 생명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세 개의 대륙에 발을 걸친 미증유의 대제국을 세우고, 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이름을 딴 도시까지 수천 년의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서 함께 살아남도록 만들었던 이 대담하고 용맹무쌍한 사나이를 쓰러뜨린 주인공은 사람의 눈에 보일까 말까한 한 마리 모기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줄초상으로 이어졌다. 스타테이라 자매는 록사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을 낳은 록사나 입장에서는 자기 소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할 판이었다. 록사나는 원통하게 피살당한 스타테이라 자매의 시체를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는 우물을 흙으로 메웠다. 이 불운한 페르시아 공주들의 주검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가 꿈꾸던 동서양이 융합된 영원한 제국의 꿈 또한 땅에 묻히고 말았다.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22-完)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가 일군 대제국은 분열의 길로 치달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체의 음주가무를 금지한 것은 기본이었다. 왕은 군중의 말과 노새의 갈기를 모두 잘라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게 하고는, 그것만으로는 정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제일 윗돌들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마구잡이로 인간사냥에 나섰다.
슬픔이 가져온 광기에 사로잡힌 그가 얼마나 난폭하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는지는 콧사이오이 민족이 당한 불행한 봉변이 생생히 웅변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인을 위한 제의라면서 성인 남자들을 깡그리 죽여 없앴다.
알렉산드로스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어느 정도 삭이자 바빌론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바다로 나갔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올라와 왕과 다시 합류한 네아르코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의 바빌론 행을 강하게 만류했다. 더군다나 점을 칠 때마다 불길한 점괘가 나왔으므로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입성을 포기하고 시 외곽의 임시 행궁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상서롭지 않은 신탁과 예언들을 되돌리려는 의도에서 다양한 제의를 펼쳤는데 이로 말미암아 왕이 머물고 있던 곳은 신관과 점쟁이들로 북적북적했다.
바빌론 바깥에서도 주연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네아르코스를 위한 술자리를 연 왕은 잠깐 목욕을 하고는 이번에는 메디오스가 청한 주연을 즐기러 갔다. 그는 이튿날에도 술을 마셨고 그러자 헤파이스티온을 덮친 것과 비슷한 증상이 왕에게도 찾아왔다. 왕은 심각한 고열에 시달렸고, 수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헛소리를 내뱉었다.
왕은 다이시오스 달 18일부터 앓기 시작해 그달 30일 저녁에 죽었다. 뜨거운 목욕도, 신에게의 기도도, 병사들의 간절한 응원도 알렉산드로스를 살리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유명을 달리한 날짜를 현대의 역법에 입각해 계산하면 그는 서력으로 기원전 323년 6월 15일에 사망한 셈이 된다.
당시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지금과 비교해 덜 건조했다. 따라서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가 많았다. 후세의 의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말라리아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가 독살설을 부정하고 있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모기에 물려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더더욱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이 독살당한 시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깨끗했다는 사실을 독살설에 대한 반박 근거로 제시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나라 안팎으로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칼과 창도, 도끼와 화살도 그의 생명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세 개의 대륙에 발을 걸친 미증유의 대제국을 세우고, 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이름을 딴 도시까지 수천 년의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서 함께 살아남도록 만들었던 이 대담하고 용맹무쌍한 사나이를 쓰러뜨린 주인공은 사람의 눈에 보일까 말까한 한 마리 모기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줄초상으로 이어졌다. 스타테이라 자매는 록사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을 낳은 록사나 입장에서는 자기 소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할 판이었다. 록사나는 원통하게 피살당한 스타테이라 자매의 시체를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는 우물을 흙으로 메웠다. 이 불운한 페르시아 공주들의 주검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가 꿈꾸던 동서양이 융합된 영원한 제국의 꿈 또한 땅에 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