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2)
<1936년 서안(西安)사태 직전, 부사령관 장학량(좌)과 총사령관 장개석(우)>
<같이 들으실 음악은 "전우여 잘자라"입니다. 관련 곡들이 서안 사태(사건)을 일으킨 "장학량"을 미화하는 중국 드라마 관련곡들 뿐이라서 넣지 못하고, 나비효과로 간접 관련 있는 6.25전쟁 때 실제 남한에서 불렸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군대노래 중 국내 최고라고 생각하며, 과거에는 "고무줄 놀이"에서도 많이 불리면서 웬만한 7080세대 여성들까지도 멜로디는 알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대만/중국편의 번외편이나 완전히 별개의 내용입니다.
이 글 보시고 아래 글들을 보시면 이해에는 분명 더 좋습니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3: 작사자도 결국 숙청당한 『중국 국가』 & 모택동의 망언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4: 한국과도 인연 깊은, 비운의 『대만(=중화민국) 국가』
책 한권의 엄청난 나비효과: 태평천국의 난 (19세기 최대 군사분쟁)
<일반인의 개인적 정리글일 뿐이니, 맥락 위주로 보시는게 좋습니다.>
아래의 전편에서 이어지는 완결편입니다.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② 1936년 12월 12일의 "장학량", 서안 사태을 일으키다
"장학량"이 이중플레이를 하고 그의 동북군 수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보고가 "장개석"에게도 일부 흘러들어갔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통 큰 결정으로 믿고 있었던데다가, 바로 내친다면 공산당 잔당과의 내전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기에 그러한 보고는 일단 마이너한 것으로 보고, 공산당과 대치중이었던 동북군이 위치한 "서안"으로 약간의 호위부대와 함께 찾아갑니다.
여기서 미적거리는 동북군에게 교전을 독려하고, "장학량"과 그 수하 장교들 및 동북군의 동향을 살펴 문제가 있는지도 점검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당 혁명군 전체 대비 동북군은 미미한 규모였기에, 설마 반란을 일으킬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장개석"은 몇 일간의 진지 시찰과 회의를 거듭한 후, 난징으로 돌아가기 전날,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밤이 늦어 경비를 강화하지 않고 그냥 잠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장학량"과 "양호성(=양후청)"은 그때부터 동북군을 통제한 뒤, 소수의 충성심 있는 수하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장학량과 양호성>
"장개석"은 12월 12일 새벽 4시반 경 일찍 일어나 체조를 하던 차, 총격소리를 듣고 반란을 직감하고 피해야 한다는 호위병의 보고에 근처 뒷산으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그 와중에 대다수 호위병이 반란군에게 사살되었고, 그 역시 높은 담장을 넘다 몸을 다쳐 피신하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결국 더 이상 피신은 의미없다고 보고, 동굴 안에서 다친 채로 누워있던 그는 반란군 장교에게 업혀서 산을 내려와 진지 내에 감금당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명분이었지만, 이미 "장학량"은 공산당과도 어느 정도 가까이하고 있었으며,국민당/공산당이 힘을 합쳐 만주/동북의 일본군만 몰아내면 자신이 다시 동북/만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욕심을 부렸던 것이죠.
"양호성"은 과거 공산당 가입신청 경력이 있을 정도의 서북 군벌로 이미 "장개석"에게 사실상 투항해 유랑을 다녀온 경력이 있었기에, 서북에서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서는 오히려 공산당이 남아있는게 나았다고 봤을 수 있습니다. 공산당이 사라지면 자신의 영역을 고스란히 국민당 정부에 넘겨야 하는 것이었죠. 그는 "장학량"보다 20년 정도 경력과 나이가 많았기에 우유부단했던 "장학량"과 달리 서안 사태에서 "장개석"에 대해 좀 더 강경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③ 2주간의 감금, 죽음의 문턱에서 오고 간 많은 이야기들
갑작스런 굴욕과 부상을 입고 감금된 "장개석"은 식음을 전폐하고, "장학량"과 "양호성"이 요구한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그들이 요구한 8가지 조건은 아래와 같습니다.
- 난징 (국민당) 정부를 개편, 각 정파를 참가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질 것.
- 일체의 내전을 정지할 것.
-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당시 항일시위로 체포된 7인방)
-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할 것.
-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 "쑨원"의 유언을 확실히 준수하고 실행할 것.
- 즉시 구국회의를 소집할 것.
"장학량"은 이 조건을 12월 12일 저녁, 난징 국민당 정부에 통보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정말 순수한 애국심으로 항일투쟁에 올인할 것을 조언하고 싶었다면, "장개석"을 만났을 때 부사령관으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도자급들의 내분은 보기 좋지 않으므로 일단 내부회의를 통해 처리를 시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의 말로는 몇 번의 제언이 거절되었다고 하나, 그럼에도 갑작스런 총사령관 납치감금 및 당일저녁 난징 국민당 정부에 8개 조건을 통보까지 했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공산당 편에서서 자기의 훗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이 뒤집힌 사람에게는 현실이 제대로 보일리가 없습니다. 당시 일본제국의 군대는 적어도 아시아 최강이었지요. 일본 유학파인 "장개석"은 당시의 중화민국 군대로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단 "선 통일, 후 항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화민국이 둘로 나뉜다면 일본과의 항전을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내부 통일을 하고 군비를 대폭 키워서 일본과 맞서야 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동북 접경 지역에 군수공장들을 건설하고 몰래 군비를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에 퍼져서는 안될 내용이기 때문에 기밀사항이었고, 공산당 성향을 가진 동북/서북 출신 장교들은 특히 이런 정보를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장개석"의 관점에서는 1936년말까지 공산당 잔당만 소멸시키면, 2년 정도 군비를 확대해서 1939년 경 정도부터는 일본과 본격적으로 맞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일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동북 특히 만주지역은 전통적인 중국 영토도 아니었던 데다가 워낙에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지역이라 일본군에 넘어가도 일단 어쩔 수 없으며, 그 외 중국 본토 지역을 통일하고 국력을 쏟아부어야만 일본에 맞설 수 있다는 판단인 것이죠.
그러나 "장학량"은 자신이 관할하던 동북/만주를 뺏긴 분노, 주로 관할지역 출신이 많았던 동족인 공산당과의 싸움을 지휘하는 것 등이 못마땅했고, 일본과 바로 싸워 이기면 마치 그 땅이 다시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 겁니다.
납치소식을 들은 난징정부는 "장개석" 구출보다도 서안을 폭격하여 반란군을 전부 없애는 쪽으로 의견이 기웁니다. "장개석" 또한 감금된 곳으로 협상을 시도하러 왔던 이에게 "서안의 반란군 지역을 폭격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폭격이 이루어져서 반란군들도 놀란 상황이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자신의 죽음은 (속으로는 겁났을지언정) 겉으로는 초월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국민당 정규군을 상대할만큼의 규모가 못되었고, 심지어 동북군 내에서도 반란군 일부를 제외하면 반란 이후 "장학량"의 지시를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당 혁명군의 폭격기가 서안 비행장으로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계속 8개조를 들먹이며 국공내전 종료 및 항일투쟁 올인을 강요합니다. 이것을 들어주면 풀어주겠다고도 합니다. 수하장교들은 "장개석"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의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스탈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장개석"을 살려두라는 의견을 받게 됩니다. 그가 없어지면 중국은 더 심한 내전 상황이 될 것이고, 이것은 일본을 견제하면서 공산당을 확대시켜야 하는 중국 공산당 및 소련의 입장에서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죽이지 말라고 방침까지 내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장학량"을 찾아와 "장개석"이 8개조를 승인한다면, 그 즉시 우리는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약속하고 갑니다. 물론 실제로 공산당의 "모택동"은 물자는 지원받고 항일전투는 가능한 피해서, 실제로는 국민당 군력만 소모하게 만들 전략이었습니다. 이 무렵의 "장학량", "양호성"의 동북/서북군이 얼마나 공산당과 가까웠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스탈린의 영향력이 상당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렵의 "모택동"과 "주더"가 만든 공산당은 사실상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만든 것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공산당이라 부르지만, 당시 이름도 소련이 실제로 소비에트공화국이었듯이, 그것을 따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었고, 국민당 정부를 견제할 교묘한 위치에 설립했었습니다. 물론, 계속 국민당에 토벌되면서 쫓겨서 서안 위쪽으로 도망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중국 공산당)의 설립 및 이동 경로>
"장개석"은 부인인 "송미령"이 절대 감금장에 협상하러 오지 못하게 막으라 지시했지만, 당찬 여성이었던 "송미령"은 "장개석"의 일기장을 들고 직접 협상장으로 나섭니다. 잘못하면 같이 감금될 판이었지요.
"송미령"은 "장개석"과 결혼 전, 이미 "장학량"을 만나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긴 했습니다. 실제로 "송미령"은 "장학량"을 지지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송미령"의 언니는 "장개석"이 현 대만으로 밀려날 때에도 중국 본토에 남아 모택동 밑에서 중국 부주석을 지냈을 정도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형제자매 간에도 이념 갈등이 매우 심하던 시기였습니다.
"장개석"이 항일투쟁을 장기적으로 준비하고 있고, 일본의 강함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송미령"이 가져온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된 "장학량"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서안사태를 벌인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실제로 둘은 가까워진지 얼마 안되서 서로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장개석"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장학량"은 그런 편이어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었습니다. 부사령관이 되었지만, 총사령관의 생각을 전혀 몰랐던 것이죠. 이것은 물론 양쪽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억지 투항했더라도 일단 부하가 되었다면 최선을 다해 상관을 지원하고 (부당하지 않다면) 명령을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동족인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다면, 적어도 계속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고,그 과정에서 서로 소통했다면, 이런 납치극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장학량" 밑에 있던 공산사상의 동북 출신 부하장교들과 "양호성"의 서북군, 실제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세력의 음모에 놀아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해서는 안될 일을 벌이고 만 것이었죠.
"장학량"은 이때부터 고민에 빠집니다. 후일 "내가 장개석의 일기장에 적힌 그의 애국심과 신념을 1/10만 알았었더라도 이런 사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년 후 그는 다 늙어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사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독백한 기록도 있습니다. 후자는 자신을 오래 가택연금시켰던 "장개석"에 대한 일말의 분노와 현재 중국이 자신을 미화하는 상황에서 뒤늦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일기장을 못봤고,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설득을 듣지 못했던 시점에서는 사태를 일으켰을 것 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어 보입니다. 그 마음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거다라는 것이 속마음인 것이죠. 실제로 "장학량"은 어릴 적 친분으로 인해 "송미령"에게 약한 면모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감금 중간에 장개석을 풀어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강경파인 "양호성"이 풀어주는 걸 반대하고 있으니, 내 군병으로 변장을 하고 진지를 벗어나 피신하는 것이 어떤가를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에는 "장개석"도 부인 "송미령"도 떳떳하지 못한 변장을 통한 이동 같은 것은 명예에 맞지 않다. 차라리 죽음을 맞겠다고 할 정도로 그 둘은 당찼습니다.(속으로는 긴장 좀 했겠지요)
결국, 소련의 스탈린마저 "장개석"을 풀어주라고 한 마당에서, 예상과 달리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수시로 폭격을 해오고, 만약 납치감금 건이 잘못 처리될 시 서안의 반란군을 몰살시킬 계획도 세우고 있었던 것을 고려해서 강경파였던 "양호성"마저 돌아서 결국 "장개석"은 12월 25일 약 2주만에 풀려나게 됩니다.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가는 "장학량", "양호성" 뿐 아니라 딸린 군대까지 몰살 당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개석"이 얼마나 당찼는지는 풀려났을 때의 그의 태도와 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감금했던 "장학량", "양호성"을 앞에두고 누워서 말을 합니다.(물론 다친데다가, 식음을 기피하여 몸이 안 좋았습니다)
"둘의 마음은 잘 알았고, 나도 책임이 있다. 돌아가면 이를 중앙정부에 고하겠다."고 말한 그는 난징 정부로 돌아가서 사임을 합니다. 물론 반려됩니다.
당시 누구도 "장개석"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었거든요. 오죽하면 "장학량", "양호성"마저도 그를 풀어주고 그가 앞장서서 항일투쟁을 벌여, 잃어버린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를 바랬을까요.
"장학량"은 신념이나 경험이 적다보니 주변 부하들과 공산당 세력들에 놀아난 성격은 분명 있습니다. "장개석"같은 인물이 필요했기에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8개조를 요구할 때 같이 보낸 전신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동북을 뺏기고 5년 간 굴욕을 당해왔다. 장병들은 피로 싸우고 있는데, 후방(=국민당 난징정부)에서는 외교 당국이 (일본과) 타협을 꾀하고 있다. 나 장학량은 이제까지 눈물로 진언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마침내 좌시당함을 참지 못하고 장공을 충고하기에 이르렀다. 안전은 보장한다. 반성을 촉구할 뿐이다."
어린 시절 "장학량"과 친분이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이 말을 보고 "장학량"을 믿고 협상장에 간 것 같기도 합니다. "장학량"이 군벌 집안에서 자라 호탕하고 헛된 말은 안한다고 본 것일 겁니다.
3) 귀가 얇았던 "장학량"의 2차 폭망 및 그의 로맨스
"장개석"이 풀려난 이후, 공산당(홍군)은 "장개석"이 국공합작에 동의했다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하지만 구두로 간접 승인했을지는 모르나, 어떤 문서나 조약으로 동의한 적은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여론조성용이었죠.
이것은 "장개석"이 풀려날 때 자신을 납치한 둘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국가의 대국을 중시, 나를 난징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했다. 문서를 조인하라거나 명령을 내리라거나 하는 강요를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떠한 특수한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이는 우리 중화민국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으로 나갈 절호의 기회일 뿐 아니라 실로 중화민족의 인격과 고상한 문화의 표현이다. 너희들은 이제까지 반동파에게 선동되어 나에 대해 불평등하다든가, 혁명에 불성실하다고 생각해왔다. 사변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면 나에게도 또한 책임이 있다. 나는 최고통솔자로서 부하에게 이러한 위법행위를 하도록 한 책임을 지고 중앙에 스스로 처벌을 정하는 동시에 너희들의 회개의 심중도 중앙에 전하겠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일생을 통해 다만 국가의 존망과 혁명의 달성을 위해 살아왔다. 개인적인 원망, 생사, 이해득실을 위해 일을 꾀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장개석"도 충격이 컸는지 복귀 후 1개월 간 휴가를 보내며,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데요. 가능하면 내전을 피해야한다는 쪽에 가까웠던, 아내 "송미령"의 의견을 참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튼 동/서북 지역군의 통제가 어려워진 상태에서 공산당의 선전과 항일 시위가 맞물리며, 전국적으로도 항일여론이 고조되고 있었기에 공산당 토벌을 잠시 미룹니다.
일본도 추후 중국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했는지 예정을 앞당겨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쳐서 항일에 올인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장학량"은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받았고, 이듬해 1월 "장개석"의 특별사면을 받았으나 가택연금이 되었습니다.
강경파였던 "양호성"은 추후 투옥되었다가, 공산당에 가입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1949년 처형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자손들은 공산당 고위 관료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은 그를 우대하였습니다. 문화혁명 시절의 홍위병들에게는 군벌 시절의 잘잘못을 가지고 묘를 부관참시당하기도 했습니다만, 현재는 중국에서 치켜세우고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서안사태에서 우유부단했던 "장학량"은 처형되지 않았지만, 그의 가택연금 상태는 "장개석" 및 그의 아들 "장징궈"가 죽을 때까지도 계속되어 1991년에 가서야 해제되었습니다. 국민당이 일본과의 투쟁에 모든 에너지를 쓰고 여러 요인이 맞물리면서, 공산당에게 최종적으로 패하고 대만으로 밀려남에 따라 그도 대만으로 옮겨져서 계속 가택연금이 되었습니다.
대만 입장에서 받는 분노, 대만 내 정치적 여건 등으로 인해 그는 90세까지 가택연금되었습니다. 이때 있었던 특이한 점이 로맨스 드라마로 많이 그려지는데, "장학량"의 본 부인이었던 "위펑즈"는 남편의 가택연금이 오래되자, 따로 살아온 반면, "장학량"을 따르던 다른 여인은 가택연금된 곳까지 와서 함께 살아주자, "위펑즈"는 "장학량"과 기꺼이 이혼해주어 두번째 부인과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젊은 시절을 우유부단함과 기회주의 군벌로 살아 온 "장학량"은 연금된 상황에서 명/청나라 역사전문가가 되었다고 하네요. 한때는 "장개석"에게 시계 선물을 보내 연금을 해제할 것을 부탁한 적도 있으나, 서안 사태로 인한 나비효과들의 분노가 남았던지 "낚싯대"를 보내 더 많은 시간 책을 읽으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랜 가택연금에 스트레스가 커졌는지, 중국에서 자신을 미화해서인지는 몰라도 "장학량"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차 자신을 합리화하는 발언들을 하다가, 104세에 하와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와중에 참 오래 살았네요
중국에는 스트레스를 잘 풀라는 의미로 재미있는 농담이 하나 있는데요
"술담배를 안한 "린바오"는 63세 사망(비행기 추락), 술만 마신 주은래 73세 사망, 술담배 다한 모택동 83세 사망, 술담배하고 카드도 즐긴 등소평 93세 사망, 술담배+카드+첩을 즐긴 장학량 104세 사망"
참 아이러니하지요?^^
4)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어디까지나 아쉬운 마음에 하는 가정일 뿐이지요.
① 한국: 6.25전쟁 발발, 적어도 중공군 참전은 없었을 수도
공산당이 소멸하고, 중화민국이 공화국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비록 별볼일 없던 "김일성"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당시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세워진 곳이긴 해도 중국의 도움 없이 그렇게 쉽게 북한 괴뢰정권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북한 지역은 토지몰수 및 재배분이라는 역사적으로 늘 사기였던 당근을 제시한 정책에 너무나도 손쉽게 공산화되었었지요. 북한괴뢰정권이 생기지 못했다면, 6.25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구요.
소련 주도로 북한괴뢰정권이 세워져 6.25전쟁이 발발했다 하더라도, 당시처럼 중공군 참전이 불가했을테니, 아마도 북진통일이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6.25전쟁 당시 소련은 유럽과 힘겨루기가 워낙 심해서 직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할 상황은 아니었던 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② 대만: 중국 본토를 차지한 공화국이었을 수도
서안 사태 후 항일여론이 거세지고 일본의 북경 침공이 빨라진 관계로, "장개석"의 국민당은 결국 산 속으로 도망다닐 정도로 소멸해가던 모택동, 저우언라이의 공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로,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선에 뛰어들게 되는데요. 전쟁의 와중에 공산당은 물자도 지원받고 피폐한 상황에 처한 국민들을 세뇌시키면서 오히려 더 성장하는 반면(=실제로 모택동은 모집된 군대나 물자의 10%만 항일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공산당을 확대하는 전략을 사용),
중화민국의 정통정부라는 자부심을 걸고 실질적으로 일본과의 주요 격전을 치뤄냈던 국민당은 오히려 세를 불리기는 커녕 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1945년 일본 항복 후, 국민당과 공산당 간 제 2차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퇴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마는데요.
가끔 대만 정부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렀을까 궁금해집니다.
③ 일본: 좀 더 편하게(?) 만주 및 중국 지역에 침투했을 수도
아무래도 양쪽이 싸우고 있다면 좀 더 유리했을 듯 합니다.
④ 동남아 등 중국과 국경 인접국가들 : 더 많은 민주국가가 나왔을 수도
중국과 인접한 국가 거의 대부분 같은 공산주의 체제를 사용하고 있지요. 공산당에게 무기, 물자를 지원하고 스파이활동도 독려하는 등 다양한 공산주의 전략전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인데요.
중국이 현재의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 현 대만 정부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더 많은 동남아 국가들이 자연스레 민주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상황에서 식민지도, 공산주의도 피해 간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면이 많긴 하지만) 태국이 가끔 신기합니다.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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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미국을, 어쩌면 세계 판도를 바꾼, 단 한 장의 문서: 「스페셜오더 191」
100세를 넘기다니 정말 오래살았네요ㅎㅎ 너무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중국 수명 관련 농담의 단골 손님인 듯 하네요.
저는 비흡연자인데, 흡연하는 동료들이 담배 한 대 피고 들어와 성과가 좋아지는 걸 볼 때면, 스트레스 잘 풀리는 것 같아 가끔 부러울 때가 있긴 해요.
그나마 술은 좋아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담배는 안하는데 술은 가끔 합니다 요즘 더울수록 맥주가 많이 생각나네요ㅎㅎㅎ
국공합작.........장학량.......104세 사망... . .. . . . 등소평이든 모택동이든 연금당해 살은 정학량보다 더하면 더했지 설마 첩이 없었겠습니까(뭐 성격에 따라 없을수도 있겠지만)... . .... . .. .저시대는 10대때 일찍 집안끼리 결혼해서 애낳고 연애는 20대때 하던것 같던데여........
장개석이 중국 집권해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면 지금 세계정세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정말 상상이 안갑니다. 중국이 현재 어느나라처럼 변해있었을까요? 지금의 인도처럼 되었을까요? 아님 호주? 필리핀? 몽고? 이라크? 대만? 브라질? 터키? 어쩌면 장학량이 만주국새로새우고 장개석이 상하이쪽차지하고 위구르,티벳국가 그대로 있고 그랬을 수도. .. . .. .. .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냥 104세까지 산 것을 부러워해서인지, 그런 농담이 있다고 하네요.
스마트한 의견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