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을 자극하는 감상이 되기 바라며
감상을 자극하는 감상이 되기 바라며
가끔 용감한 표현을 본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문장을 보면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다. 세상에, 그게 가능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조금씩 있다. 그 조금의 종류와 숫자가 너무나 많아졌고, 경우의 수는 무한대가 되어 버렸다. 무한대란 신도 모르는 숫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내 의견이고, 내 고정관념일 뿐인지 모른다. 혹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성을 가진 누군가는 아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그림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림을 좀 더 잘 이해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다양한 그림을 많이 보면서 느껴보는 것이다. 그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같은 것을 아주 다르게 본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나눔에 익숙해지면 그 다른 정도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늘 미술사를 공부해 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왜, 어떻게 그렸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내가 미술사를 강독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이 학생의 그림에 감상을 달기로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림에 달린 글은 순전히 내 감상이다. 가능한 하나의 감상일 뿐이다. 그림에 비해 감상이 지나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림에게 자극받은 상상력이 날개를 펴서 날아가 버린 경우다. 해설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나는 이 학생의 그림에서 뛰어난 재능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피카소처럼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그림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의 바다에서 헤엄쳐본 경험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리라. 나는 이 학생과 페이스북에서 만났고, 내 인생의 책이었던 ≪책의 정신≫ 출판기념회에서 얼굴을 잠깐 보았다. 그 이후 그림을 볼 기회가 더 많이 있었고, 표현의 대담함과 ‘스타일 없음’에 매혹되었다. 화실에 나간 것이 겨우 일이 년 된 학생의 그림이라는 것에 더 그랬다.
물론 미숙한 점도 있다. 제목을 보고 그림을 보아도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내가 그 학생과 소통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완성도가 높은 것도 있다. 어쩌면 미숙하기 때문에 더 감동적일 수도 있다. 피카소가 했던 말이 그것 아니겠는가. “어린이처럼 그리는 것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
__그림, 폭력(연작 가운데 하나), 주예지
권력과 폭력은 벼랑 끝 도전으로 내몬다. 언어가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권력관계에서 소통이란 지시와 수용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복창을 통해 수용이 확인되지 않을 때 폭력은 시작된다. 정치적인 인간 집단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저 커다란 입에 물려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은 어린 시절 어른들과 또래집단에서 내성적인 아이의 경험에서부터 지시받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 폭력에서 탈출하기 위한 도전은 벼랑 끝에 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력은 저렇게 말 한 마디로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내팽개치고 목줄을 당길 수 있는 것이니. 극단적이라고? 맞다. 예술은 그 극한의 경험을 보여준다. 그래야 그것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읽고 갑니다 @kyung45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