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짐작합니다.
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짐작합니다. 중요한 미덕을 보여주니까요. 물론 실제였는지도 모르지요.
아마 팔십년대 이야기일 겁니다.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 같아요. 운동권에서 역할을 맡은 분이었나 봅니다. 늘 바쁘게 ‘문제’가 있는 현장을 쫓아다니던 아버지를 둔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오셔서는 늘 작은 상을 펴고 뭔가를 기록하셨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빠뜨리는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그날의 일을 적어 두시나 했습니다. ”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당시에는 경찰서에 한번 연행되고 나면 한동안 소식도 없었습니다.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셨던 겁니다. 한 번은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시잖아요. 당시 고문기술자들은 사람 잡는 백정 같은 놈들이었다는 걸.”
무서운 말이었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통에 제가 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얼마나 오래 삭이면 그리 될까요.
“그래도 ‘괜찮은’ 판사를 만나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시긴 했습니다. ......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일말의 양심은 있었나 봅니다.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으니 보내준 것이지요.”
잠깐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잊은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야 어떻게 보이든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겠지요.
“잡혀 들어가 계시는 동안에도 기록은 계속하셨던 건가요?”
“예, 저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겠거니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무엇을?"
"사람들 이름뿐이었습니다. 노트 한 권에 빼곡이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겁니다.”
그는 노트 한 권을 보여주었다. 앞부분부터 넘겨보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적은 명단이었다.
“누구 이름인가요......?”
“저도 알 수 없어서 어머니께 여쭤보았습니다.”
갑자기 궁금증이 치솟아 오르는 바람에 느릿느릿한 말투가 화가 날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셨군요.”
“아버님은 사람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그 일이 너무 힘겨우셨나 봅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하신다는 신념을 가지셨지만 군사독재의 하수인일망정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현장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셨다고 해요.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오시면 그 상대방의 이름을 떠올리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답니다. 왜 성경에 나오잖습니까.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세상에! 진정한 종교인이셨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닙니다. 저도 그런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죠. 저는 그 이름들을 그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언제 어디서 누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이스라엘의 아이히만>을 기억하시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용서는 제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지요. 저는 그들이 살아서 용서를 빌게 만들 작정입니다. 한 놈, 한 놈 짚어 나갈 겁니다.”
순간 조금 전에 본 노트 앞부분에 가위표를 친 이름들이 떠올랐다. 다시 확인하기 위해 노트를 집어보려는데 그의 손이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