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와 동백꽃

in #kr7 years ago

먼저 이 기사를 읽어 보자.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6371.html?_fr=gg#cb

사회운동에 관한 여성들의 방식에 100%동의하진 못하지만(내 동의와 상관없이 지금은 여성들의 시간이고, 그들 방식대로 진행하는 걸 지지한다), 미투에 대한 남성들의 의식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성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남자들은 여전히 '가해하는 자신과 당하는 여자'라는 무의식적 프레임을 전제하고, '내가 잘못했네'라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이는데, 미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하는 나와 가해하는 남자'라는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 길가다 험상궂은 남자에게 빌딩 사이 좁은 틈으로 끌려가 바지가 벗겨진 뒤 항문에 갓 꺾은 나뭇가지가 쑤셔 넣어지는 상상을 하지 않으면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일을 당한 남자에게 '나뭇가지가 들어갈 때 기분이 어땠냐?', '나뭇가지가 개나리였나, 버드나무였나?'를 물어보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미투인거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하일지와 같은 사람들도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성'을 이야기하는 오류가 있다는 건 남자들이 얼마나 더 나아가야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남자들이 피해자 사고에 취약하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가해자였는가를 말해 주는 선명한 증거나 다름없다.

하일지가 동백꽃을 이야기할 때 그건 점순이에 대한 모욕을 넘어 동백꽃이란 소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여 한마디 남긴다.

김유정은 식민지 치하의 피해자 지식인이었고, 그러면서도(그래서인지) 모던한 시대의 이 젊은 지식인의 시선은 도시보단 농촌에(친구 이상과 비교해 보라), 지주보다는 마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프로문학가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한 쪽 편에 서 있기 보다는 늘 그 경계borderline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고, 바로 그 이유로 그의 소설은 아픈 사회상을 정면으로 그리면서도 한없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동백꽃은 김유정 소설에서 젊은 처녀가 주인공인 유일한 소설이다. 특히 농촌 배경에선 거의 없는데(도시 셋방을 배경으로 할 땐 가끔 나온다), 봄봄에 나오는 점순이와도 성격이 사뭇 다르다.

점순이가 지주의 딸이라고 처지가 마름보다 나았을까? 당시 배경의 어느 소설에도 여성의 처지가 거지보다 나았다는 증거는 없다. '운수 좋은 날'이나 '감자'에 나오는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비참의 극을 달린다. 게다가 그들은 늘 남성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동백꽃에서 점순이는 주인공을 유혹하고, 좌절하다가 끝내 성취한다. 그리고 그 성취는 곧 '점순이 이 년 어디갔냐!'는 어머니의 호령에 짧게 막을 내린다. 점순이 인생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성취일까, 순종일까? 점순이는 그 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늘 그렇게 지주의 딸로 동네 총각들을 연쇄적으로 후리(?)면서 살았을까, 아니면 곧 시집가서 인력거의 아내('운수좋은 날')가 되거나, 칠성문 밖에서 송충이를 잡는 아낙('감자')이 되었을까(참고로, 감자의 복녀가 시집을 간 나이는 15세다)?

동백꽃에서 주인공이 점순이를 싫어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소설은 '열일곱씩이나 된 것들이 수군수군하고 붙어 다니면' 이라든가 '내가 점순이하고 일을 저질렀다가는' 이라는 묘사를 통해 신분에 의해 자연스런 교류가 막혀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이런 관계가 점순이의 적극성으로 해소되는 과정을 짧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같으면 아름답고 귀여운 사랑이야기 정도의 단편이 위대한 소설이 된 건 역설적으로 마름이라는 비참한 신분과 여자라는 더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동백꽃처럼 피더라는 작가의 메시지때문이다(김유정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부디 이 작품이 이상한 도식적 인식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경마장 가는 길'은 나도 소싯적에 재밌게 읽었다. 거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점순이가 현대에 태어났으면 그렇게 됐을 법한 유쾌 발랄한 인물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찌질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내 기억이 그렇다. 오래돼서...).

작가 하일지가 여전히 그 남자에 머물러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윤택, 고은, 박범신, 이인화, 그리고 하일지까지...그들은 왜 박제가 되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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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본질은 권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남성보다는 여성이 상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 남성들이 확실히 피해자 사고는 취약해보입니다 펜스룰을 말하는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합니다. 그래도 이런 미투운동 등이 확산되고 활발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느 진영의 편을 든다기 보다는, 범죄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인식'의 결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우리 사회에 이 부분에 있어 좀 더 발전적인 태도를 취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잡음이 있겠지만, 결국은 잘 되어 갈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