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골절, 그 뜻밖의 여정 3탄
살면서 독감도 걸려보고 식중독도 걸려 봤지만, 다리 한 쪽을 못 쓰게 되어버린 경험은 또 처음이라 많은 영감을 얻었다. 혜민 스님이 말씀했던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 다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 놀랄 만큼의 우울함과 지루함이 일으키는 꽤 쓸만한 창조력
방에서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는 긍정적인 것들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부정적이다. 어쩐지 모든 것이 때려치우고 싶어진 골절 3주차 오후,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인생에서 이렇게 우울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이거 혹시 우울증이야?'
'응. 아니야'
단호하다. 칼로 썰어버리는 대답이다. 고민 해결! 이 될 리 없었다. 난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근데 진짜 심하게 우울해. 감정 조절이 안 된다니까. 눈물도 나고."
친구는 답했다.
"원래 아프면 다 그래. 마치 네가 일요일 밤만 되면 갑자기 머리 어깨 무릎 발이 다 아프고 내일 회사에 가면 불치병에 걸려 버릴 거 같은 느낌 같지."
아, 우울증 아니구나, 근데 우울증은 아니더라도 너무 심심하다. 텔레비전에서 볼만한 드라마도 다 봤고. 누워서 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내가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이때가 스프링을 펼치기 전 웅크리는 순간이었다.
다친 지 4주가 지나자 마음속에 단단히 묶여 있던 굵은 끈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처럼 상쾌해졌다. 상황이 좋아지거나 다리가 다 나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언가 하고 싶다. 의미 있는 무언가가.
블로그를 개설했다. 스팀잇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영상 편집을 배워서 Youtube에 올릴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 다 '언젠가는 해야지'라고 몇 년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니 우울한 마음이 일어날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
- 사람들은 거의 착하고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걸 나만 모른다.
아파트 고치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한 달간, 나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남들에게 다친 걸로 주목받는 기분도 별로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게 내키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방 안에서 폰질을 하다가 '이대로는 못 있겠어!!!!!'하는 마음이 나를 일으켰다. 만유인력에 저항하는 대단한 힘이었다. 나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낑낑거리며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목발을 짚고 카페로 출발했다. 목표는 스타벅스다.
계산대 앞에 선 나는 떨리는 마음을 살짝 억누르고 직원분에게 말했다. "저... 제가 다리를 다쳐서 그런데요. 커피를 혹시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대답은 어땠을까? "물론이죠"다. 소소하지만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스타벅스만 그랬을까? 투썸플레이스도, 그 후로 지금까지 갔던 모든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든 아니든, 사람들은 측은지심을 가졌고, 약자에게 대체로 친절하다. 내 말을 믿어봐도 좋다. 직접 그들의 눈빛을 보고 느낀 거니까
지금도 스타벅스에 와서 글을 쓰고 있다. 요즘은 매일매일 카페에 다닌다. 골절인들이여! 용기롭게 집 밖으로 나가자!
- 다쳐보지 않은 이들은 다친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부디 그들에게 당연한 것도 기대하지 않길.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번에 다쳤다면, 미리 알려줄 중요한 사실이 있다. 가까운 주변인들이 당신을 좀 귀찮아하는 거 같은가? 가족은 대놓고 귀찮아한다. 약간 코믹하게 귀찮아하고 매우 당당하다. 그래서 어쩐지 섭섭하지 않다. (... 우리 가족만 그럴 수도 있다. 다른 가족은 안 귀찮아 할 수도 있다) 재밌는 건 대놓고 나를 귀찮아 것이 더 마음 편하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불편한 공기가 나를 더 슬프게 하니까.
다치고 나서 여러 섭섭한 순간들을 거치며 깨달은 바는, '아 저 사람은 내 상태를 정말 모르는구나'였다. 설명하기엔 손가락이 귀찮은 일들이다. 그들은 모. 른. 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입장이 더 기분이 괜찮긴 하더라.
신체의 일부분을 쓸 수 없다는 건, 쉽지는 않은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생긴다. 그런데 그런 것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기에는 내 인생과 당신의 인생이 너무 아까우니까. 그냥 갑자기 넘쳐 나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걸 찾아봤으면 좋겠다. 내가 4주간 방안에 콕 박혀 우울함의 바다에 빠졌다가 나와보니, 그 시간이 참 아까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