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40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평평한 곳에 오르자 다행히 좁다란 길이 나 있어 별장을 찾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도 한참을 걸은 후에야 별장 앞에 도착했다. 산 중턱에 커다란 이층집 한 채가 웅크린 짐승과도 같이 덩그마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란과 배낭을 힘겹게 담벼락 앞에 내려놓고 담을 타고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집 안팎을 세밀히 살펴보았지만, 최근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없었다. 대문을 열자, 수란은 쓰러질 듯 비틀비틀 걸어 들어와 거실 카펫 위에 맥없이 드러누웠다. 다행히 벽난로 속에는 마른 장작이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불을 피우고, 나도 수란 옆에 드러누웠다. 수란은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다. 타오르는 장작 속으로 나방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갯짓을 하며 타 들어가는 환영이 자꾸 어른거렸다.

낯선 곳에서 낯선 여자와 나란히 누운 채, 자혜를 생각했다.

자혜는 사막같이 메마른 내 가슴에 환상처럼 숨어있는 오아시스였다. 어쩌면 내가 지독한 상실감 속에서도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들은 잎에 양분을 주듯, 그녀는 나의 지친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었다.

목포에서 자혜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를 소유했다. 그것은 소유라기보다는 절망감을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술기운이 있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에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녀도 실토했지만, 그녀 역시 그 가을의 상실감 때문에 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더불어 산다는 것, 서로가 정을 나누고 사랑을 키우며 사는 가정이 얼마나 따스하고 포근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 것도 그 몇 개월 안 되는 기간이었다. 나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해주고, 나를 걱정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이었는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날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나는 사람을 때려서 생긴 돈으로 그녀의 옷을 사고 그녀가 먹을 음식을 샀다. 어쩌면 나는 그것으로 행복까지도 살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위태로운 행복의 사다리를 걸쳐놓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사악한 뱀이고 사갈이었다.

내 주먹에 느껴지던 살과 뼈의 일그러진 감촉들.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들. 그들의 겁먹은 눈동자. 그러한 영상들은 내 가슴에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를 아로새겼다. 특히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던 마이클 로빈의 손. 마이클 로빈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그처럼 연이어서 잔인하게 가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무시무시한 악역을 맡아 그 역을 냉정하게 수행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였다. 누가 나를 변호를 해줄 것이며, 누가 나의 무덤에 장미꽃 한 송이라도 바치겠는가. 오히려 나는 지탄받아 마땅한 악당 중의 악당인 것이다.

수란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비스듬히 내게로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심한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젖어 방금 사우나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아파요!”

수란이 비명을 지르듯이 한마디 내던졌다. 수란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니, 불덩이 같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해열제를 하나 먹이고, 옷을 모두 벗겼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연고를 잔뜩 짜서 수란의 몸에 골고루 발랐다.

그것은 이미 남자의 시선을 끌 아름다운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멍이 들고, 터지고 찢긴 상처가 수십 군데였다. 약을 다 바른 후 옷은 입히지 않고 배낭에서 꺼낸 군용담요로 몸을 감싸주었다. 또 물수건을 만들어 머리에 얹어주었다.

수란은 계속 혼수상태였다. 가끔씩 눈을 떠 내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혼수상태로 빠져들곤 했다. 나는 비몽사몽간을 헤매며 여자 옆에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