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L 병장의 하루 (2016) - 사람을 밖에서 보면 희극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비극이다.

in #kr7 years ago

<소설> L 병장의 하루 (2016) - 사람을 밖에서 보면 희극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비극이다.



주의 : 다소 폭력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거부감이 있으시면 보지 않기를 권합니다.

본 소설은 2016년에 제가 생애 최초로 쓴 단편 소설입니다. 제가 쓴 공병기라는 책에 수록되어있습니다. 더 많이 알리고자, 이 소설의 전문을 올립니다. 졸작이지만 재밌게 보십시오.

그 전에 공병기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면 다음의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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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기> - 절망으로 가득 찬 이 책을 당신에게 권하는 이유 : https://steemit.com/kr-newbie/@hamishlee/3cqk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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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병장의 하루> (2016)



아침 기상을 알리는 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L 병장은 신음을 내면서 조금씩 의식을 되찾으려고 해보았다. 10분 뒤에 점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점호가 끝나면 잠깐 다시 잘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참으면 잠도 다시 이리 불러올 수 있었다. 잠시 뒤척이면서 일어나려고 한 L 병장은 자신이 점호를 받지 않은 헌병임을 생각해냈다. 아무래도 간만에 기상 벨소리를 들어서 착각했던 것 같았다. 일병 이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던, 이 벨소리가 최근에 다시 들리자 L 병장은 '간만에 부대에 돌아와서 그런가?'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이 익숙해져, 초반에는 피곤해서 듣지 못했던 것을 다시 듣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L 병장은 점호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오전에 무슨 근무가 있지도 않았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 사실들로 L 병장은 '더 자도 된다.'는 안도감과 점호벨에 대한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L 병장은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L 병장이 군대에 가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것은 군 생활의 극히 초반 이야기일 뿐이었다. 매번 바뀌는 스케줄 근무에 자는 시간은 일정치 않았다. 또한, 그의 보직 특성상 쉬는 시간에는 거의 터치를 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날에는 근무 시간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잠으로 소비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 보다 더 불규칙적이고 잠에 빠져드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L 병장은 이때 잠깐 깨어나 다시 잠드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짧으면서도 깊게 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또 잠시 피어오른 걱정들을 저 멀리 금세 치워버리는 마법과 같은 잠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이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L 병장님, 아침 드십시오."

L 병장은 '어'라고 짤막이 대답한 다음, 비몽사몽에 빠진 사태로 고민을 시작했다. 늘 하는 고민이었지만, 언제나 사람을 심각하게 만드는 고민이었다. 먹지 않으면 잠을 점심때까지 잘 수 있었다. (그는 오늘부터 야간 근무에 투입된다) 먹으면 솔직히 배가 부르다는 정도의 득밖에 없었다. 근데 이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L 병장의 경우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주기적으로 간부에게서 약을 받아먹어야 했다. 약을 먹기 위해서는 공복은 지양되어야 했고, 식사는 일종의 의무가 되었다. 그런데 L 병장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일쑤였다. 간부는 직접 올라와 깨우면서 약을 먹였지만 결국에는 '힘들면 아침 약을 건너뛰어도 된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L 병장은 한편으로는 해방감이 들었지만, 다른 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약으로 인해 새로운 스트레스를 준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특히 더 신경 써주는 분위기가 느껴져서 L 병장이 느끼는 부담감은 평소의 배나 되었다. 그래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L 병장의 고민은 늘 치열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논쟁을 거친 결과 종국에는 부담감이 승리하였다. 그렇다, L 병장은 일어나서 아침을 먹기로 한 것이다.

짧지만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일어난 L 병장은 삐걱거리는 2층 침대를 조심히 내려왔다. 혹여나 밑에서 자는 사람이 있다면, 자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L 병장은 부대 전입 때부터 이런 상황을 싫어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고, 자신 또한 자면서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삐걱거림을 느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수면 초반에 자주 뒤척였던 그는 삐걱거림이 늘 불만이었다. 어떨 때는 욕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에 있는 침대가 대부분 그러했고, 아무 생각 없이 2층을 고른 L 병장의 탓도 있었다. L 병장은 짤막한 한숨을 쉬며 삐걱거림이 멈추었음을 확인하고 생활관 밖으로 나갔다. 질질 슬리퍼를 끌면서 L 병장은 신발장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나서 체련화(운동화)로 갈아 신었는데 양말을 신지 않아서인지 신발이 주는 까끌까끌한 기분이 발에 그대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못했지만, 귀찮음에 하도 많이 이리 다니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식당으로 가려던 찰나에 그는 자신이 모자를 쓰는 것을 깜빡했음을 깨달았다. 생활관에서 체련모 (군대에서 체련복-체육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를 꺼내 쓰고 식당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L 병장의 체련모는 다른 병사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계급장이 없었다. 원래 군대에서 쓰는 모자는 대게 계급을 표기하게 되어있는데, L 병장의 체련모에는 그것이 없었다. 사연인즉슨, 그는 어느 날 또다시 체련모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금방 찾겠거니 했지만, 결국 그는 체련모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를 대체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처음에는 군모를 쓰고 다녔지만, 그것은 L 병장을 부대에서 튀게 만들어주는 행위였다. 절대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어디선가 용케 버려진 체련모를 하나 구해왔다. 일병 계급장이 붙은 것이었다. 체련모에 붙이는 계급장은 계급별로 각 하나씩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잃어버린 체련모에 병장 계급장이 붙여져 있었으니, L 병장은 퍽 난감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선임들에게 부탁해 보았으나, 그들 역시 병장인지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L 병장은 차악이라 생각하고 아예 계급장을 떼고 다녔다. 적어도 '덜' 눈에 띄게 될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다들 계급을 표시해야 하는 곳에서 계급장 없이 다녀 '무계급'의 상징이라도 된 듯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소 군대에 대해 환멸을 가지고 있던 L 병장으로서는 의도치 않게 이런 사소한 것으로 '저항'하고 있던 셈이었다. 물론 계급장을 떼었다고 해서 'L 병장'이 'L 씨'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녀도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게 볼 뿐, L 병장은 여전히 L 병장이었다.

L 병장은 무거운 몸뚱어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부대가 워낙 작아 식당까지 채 5분까지 걸리지도 않았으나, 쏟아오는 졸음에 그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L 병장은 바퀴 달린 의자를 이용해 내리막길을 금방 내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은 늘 상 있었지만, 일은 저지를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금세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TV가 꺼져있음을 확인했다. L 병장은 이를 아쉽게 생각했다. 뉴스를 본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서 밥을 먹을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밥을 먹는 무리에 낄 용기를 가지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집단생활에서도 늘 혼자를 추구했다. 그래서 식사도 대부분 혼자서 했다. 어떤 사람들을 그를 보고 '왕따냐'라는 농담을 하고는 했는데(주로 간부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대강 넘기면서 '왕따는 아니지만 아싸다.'라고 대답하고 싶어 했다. 주로 그는 사람들의 손길을 피하는 쪽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대가 싫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공동체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지워진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군 생활' 이렇게 해서라도 군대에 있는 소속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싫어하는 조직에 누가 더 정을 붙이고 싶겠는가? L 병장은 늘 그런 식으로 군대와 자신을 분리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 같아서, 항상 자기만족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라도 그가 군대에서 '어찌 되었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L 병장은 언제나 위태로운 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걱정하는 모두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L 병장은 이미 '위태'의 상황을 넘어 자신이 '미쳤음'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고 적당히 구석진 곳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냉동 너비아니였는데, L 병장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워낙 좋아하는지라 2개 가져가라고 하면 3개를, 3개 가져가라고 하면 4개를 가져가고는 했다. 이는 눈치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걸리면 급양병(취사병)의 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빨리 집고, 초과분을 빠르게 해치워서 가져가라고 한 대로 가져간 것처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초반에 조금 과하게 허겁지겁 먹는다 싶으면, 정량보다 더 많이 가져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L 병장에게는 스트레스를 푸는 주요한 방법의 하나였다. 항상 허겁지겁 더 많이 먹는 것이 그에게 유일한 군 생활의 낙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딱히 어떠한 수단이 없었다. 운동에 취미를 붙인 것도 아니었고, SNS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단기간 내에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효과가 길게 가는 방법은 L 병장에게 있어서는 '먹기'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식당에서 적극 제지를 할 정도로 먹은 날도 있었다. 이 경험에 대해서 군의관은 '양을 조절하라'라고 충고했고, 그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비아니 같은 것이 나왔을 때는 내면에 있는 목소리가 '욕심을 조금 더 내라'라고 호소했고, 그는 그에 충실히 따랐다.

L 병장은 밥을 먹으면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 오후에 있을 교육을 제외하면 그에게는 모든 시간이 비는 시간이었다. 더 잘 수도 있었지만, 막상 한 번 깨면 더 자지를 못 했다. 아무래도 사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의 약자)에서 오늘도 시간을 축낼 것이었겠지만, 그래도 혹시 무언가를 새로 할 수도 있었기에 잠깐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자연스럽게 사지방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식판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급히 식당을 떠났다. 사지방에는 아침에 자리가 은근히 없으므로 빨리 가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사지방에 입장에 SNS에 접속했다. 수 많은 알람이 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할 때 L 병장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지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군대에서는 나름 외롭게 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라도 관심을 받는다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사실 이는 그가 사회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람을 확인하고, 댓글을 달고 하다 보니 SNS에서 할 게 어졌다. 원래 SNS라는 게 뜬 알람을 처리하면 그다지 할 게 없는 존재다. 그래도 L 병장은 기본 2시간 동안 SNS의 페이지의 스크롤을 무의미하게 내려서 보거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 글들은 대체로 자신의 환경에 관한 이야기로, 상당히 수위가 있는 글들이었다. 병사가 군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일정부분 자기희생을 고려하고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L 병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놈의 정치적 적 중립' 과도 연관된 문제였기 때문에, 걸리면 좋지 못한 일들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L 병장은 끊임없이 그런 글들을 올렸다. 징계를 받은 적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간혹 누군가 '위험한데 너는 왜 그러느냐?'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다.

과연 L 병장은 왜 이렇게 SNS를 사용하는 걸까. 그냥 간단하게 일상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친구들하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용도로만 써도 될 터인데, L 병장은 항상 힘주어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이렇게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 적어도 내가 마음대로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만큼은 침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이 있더라도 나는 계속할 것이다.' (징계 이후로 그 수위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L 병장이 하는 군대에 대한 가장 실질적인 저항 중 하나였다. '먹기'가 그저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SNS는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자아도 실현하는 그런 종류의 행위 중 하나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L 병장은 진작에 세상과 이별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에 '세상과 이별 하는 것' 보다는 '징계를 받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군대라는 체제가 그를 더 옥죄어 오면 L 병장은 늘 진지하게 '세상과의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고-때로는 준비해서 실행하고-는 했다 L 병장이 SNS에서 수위 있는 비판 글들을 작성하는 이유였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유롭게 그렇게 했다. 다소 눈치 보일지라도, 뭐 어쩌겠는가. 살아가려면 이렇게 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억지로 끌려왔는데 이런 이유로 죽으면 그야말로 쓰레기 죽음 아니겠는가.

SNS를 한창 하던 중에, 그는 문득 또다시 졸음이 쏟아져 옴을 느꼈다. 가서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SNS의 유혹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LOL이나 오버워치 같은 것이었으나 L 병장에게는 그것이 SNS였다. 평소 같았으면 졸음을 이겨내고 계속해내겠지만, 그날따라 L 병장은 졸음을 이길 힘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약을 먹으러 가는 일이었다.

L 병장은 사무실로 내려갔다. 담당 간부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L 병장은 빨리 자고 싶었지만, 약을 먹기 전까지는 잘 수 없었다. L 병장은 사무실에 들락날락하는 과정은 몇 번 반복했다. 한 4번째 되었을 때 드디어 담당 간부가 출근했고, 그는 약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담방 간부는 환한 얼굴로 L 병장에게 잘 쉬었는지 물어본 다음 약을 주었다. L 병장은 항상 그 간부에게 미안해하고는 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꼼꼼하게 L 병장을 챙겨주고는 했다. L 병장은 그 간부를 만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폐만 끼친다는 사실에 굉장히 미안해하고는 했다.

L 병장은 약봉지를 까고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다 먹고 나서 경례를 하고 위로 올라왔다. 갑자기 자괴감이 확 밀려왔다. L 병장은 아무리 좋은 간부라 하더라도, 약을 얻어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뭔가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그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L 병장은 약을 최대한 자기 보관하고 싶어 했으나, 마약류니 뭐니 해서 부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간부에게 받아서 그 자리에서 즉시 먹어야 했다. 또한, 주기적으로 '마약류 관리 대장'에 사인해야 했다. 그에게는 이 모든 일이 촌극 같았다. 군대에 오지 않았으면 먹지도 않았을 약을 이렇게 먹으면서 살아가다니, 그리고 이걸 먹기 위해서 매번 간부에게 웃으면서 와야 한다니. 그리고 그 약에 결국 의존하게 되다니. L 병장은 만약에 군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상담사에게 자살 미수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인 군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먼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L 병장은 약을 다 먹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왔다. 이제 그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편히 다시 자면 되는 일이었다. L 병장은 운동화를 벗고 나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생활관으로 향해 들어갔다. 생활관에 들어가자마자 삐걱거리는 2층 침대로 올라갔다. L 병장은 눕고서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L 병장은 꿈을 꾸었다. 그는 '현역 부적합 심사'라고 적힌 서류들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좋은 기분으로 사뿐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L 병장은 넘어졌다. 넘어진 L 병장은 뒤를 돌아보았는데 대대장이 발목에 족쇄를 걸어놓고 '가지 마라'라고 그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L 병장은 무시하고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무겁기는 했지만,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L 병장은 또다시 넘어졌다. 이번에는 부모님이었다. L 병장의 부모님은 족쇄 2개를 걸어놓고서는 '가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족쇄가 너무나도 컸고, 3개나 되었기 때문에 많은 힘이 들었다. 또한, 계속해서 넘어졌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가다 10번째 넘어졌을 때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럽게 외쳤다.

"도대체 왜 안 되는 거냐고!"

이렇게 서럽게 있는데, L 병장은 문득 족쇄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기쁜 마음에 다시 서류를 찾아갈 길을 가려고 했으나, 서류 또한 사라졌다. 오직 그만이 혼자 남아있었다. 이 상황에 당황하던 L 병장은 일단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계속해서 전진하면 무엇이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가면서 보이는 건 아직 땅과 하늘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건 L 병장의 숨소리와 군화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 이 두 가지였다. L 병장은 하도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일단 바닥에 앉아서 쉬기로 했다. 매끈한 바닥에 앉아 한숨을 쉬면서 앉고 있자니, 자신의 처지가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 신분에 이 보다 더 나빠지지 않은 것을 기대해야지.

다 쉬었다고 생각한 L 병장은 다시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큰 구멍이 생겼고, 그는 속절없이 그 구멍에 빠지고 말았다. L 병장은 어두운 구멍 속으로 계속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주위가 하도 어두웠기 때문에 바닥이란 생각 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계속 떨어지기만 하니, 꽤 적응되어버렸다. 바닥에 닿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주위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들은 L 병장을 지칭하는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게 네 의지가 없는 탓이야."

"너 같이 약한 인간은 도움이 안 될 뿐이야."

"너 때문에, 우리 업무만 힘들어졌잖아! 책임지라고!"

"뒤지려면 빨리 뒤지던가?"

"주변 사람들 고생하는 거 안 보이냐!"

L 병장은 그 소리를 듣고 '아니야!'라고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그 소리가 묻어질 정도로 주위에서 떠들어댔다. 귀를 막아보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계속되는 추락,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끊임없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L 병장은 주머니에 무언가 들어있음을 알아차렸다. 필시 걸어갔을 때는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었다. 꺼내보니 셔터 칼이었다. L 병장은 그걸 잠시 보더니, 곧 결심했다는 듯, 소매를 걷고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기 시작했다. 아프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긋기 시작했다. 피가 위로 솟구쳤다가 L 병장을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주변에도 묻기 시작했다. 검은색이 어느새 빨간색과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무늬가 커지면 커질수록 목소리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L 병장은 그걸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평소에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그 소리에 자신감이 늘어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피가 계속해서 사방팔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는 그 피를 보고 희열감을 느꼈다.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괴롭힐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그가 67번째 손목을 그었을 때, 피는 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L 병장은 손목을 긋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바닥과 머리가 충돌했다. 머리에서 나온 피인지, 손에서 나온 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흥건하게 바닥에 가득 찼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L 병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L 병장이 이렇게 한참 꿈을 꾸고 있을 때, 누군가 또다시 L 병장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는 L 병장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다.'라고 알렸다. L 병장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평소에 꿈을 다시 되감아 보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 꿈은 너무나도 생생했으므로,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남들에게 이야기했으면 필시 '끔찍하다.'라고 말했겠지만, L 병장은 이상하게끔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해방된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L 병장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막상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꾸었던 그 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해냈다! 그는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죽음이라는 자유를! (비록 현실은 아니었지만). 그는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너무 졸려 교육 시간까지 점심을 건너뛰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가볍게 침대를 건너뛰어 내려와서, 운동화를 신고 점심을 먹으려 달음박질 하였다. 그 L 병장을 보았더라면 '아 저 사람은 기분이 좋구나.'라고 판단할 정도로, L 병장은 기분은 좋아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L 병장이 생활관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후임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경례를 수없이 했다. L 병장은 허리를 굽히거나 최대한 성의 있게 답하려고 노력했다. L 병장은 입대할 때부터 그랬지만, 경례 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도대체 이런 것은 왜 해야 하는가 싶어 했는데, 그의 주장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결국에는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위계질서를 억지로 나누어야 하는가? 게다가 끌려온 사람들 아닌가? 이런 사람들끼리 경례를 시키는 것은 자신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경례에 대해서 거의 환멸 직전의 수준까지 갔다. 하지만 경례를 피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경례하지 않거나, 받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었으니까. 아니 이상한 사람 취급받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버릇없는 사람으로 찍히고, 결국에는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L 병장은 경례도 싫었지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나온 방안이 이것이다. 경례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성심성의껏 받아 '나는 경례를 거부하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인사를 하고 싶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자, 그것이 L 병장이 생각해 낸 해결책이었다. 받는 사람들은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에게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렇게 답할 때마다 자신이 살아있은 한 명의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이것이 사는 방식 중 하나였다.

생활관으로 다시 들어간 L 병장은 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근무가 있던 건 아니지만, 매일 주기적으로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교육은 매일 2시간 정도 있었다. 특정 근무가 아니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만 했다. 사실 교육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내용이 없었고, 헌병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하는 일들이 대다수였다. L 병장은 교육에서 2가지 모두 귀찮기는 했으나,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전자를 하면 시간도 빨리 가고, 대화에서 소외될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에 끼는 편에 속하기는 했지만(순전히 L 병장의 생각이다.) 뭔가 항상 자신은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일부로 L 병장을 소외시키는 건 아니었지만, L 병장은 항상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복귀한 지 한 달여 가까이 되는데도 이렇게 되니, 그냥 분위기에 동화를 못 하는 것 같았다. L 병장은 이런 생각 때문에 수다 떨기보다는 교육을 하길 원했다.

교육 시간이 되자 L 병장은 사무실로 내려갔다. 사무실로 내려간 L 병장은 적당한 곳에 앉았다. 곧이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담당 간부는 전파사항을 몇 가지 말한 다음, 오늘은 총기 분해 결합을 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L 병장은 적어도 수다를 떨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중앙 현관에 모포를 깐 다음, 그는 꺼내온 총기를 보았다. 간부가 시범을 보이고, L 병장도 따라서 총기 분해 결합을 했다. 처음에는 능숙하지 못했으나, 몇 번 하니 꽤 그럴듯하게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누가 보기에 L 병장은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총에 대해서 L 병장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그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L 병장은 총기에 대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 도구라는 데 명확히 그 뜻을 정의했다. 그리고 그 살인 도구를 자신이 만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그래서 총을 보면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총을 파괴하기는커녕, 그 총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쓰려고 여러 번 작정했었다. 이것은 부대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었는데, L 병장은 공포탄으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공포탄으로 어떻게 자살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입에 넣고서 중상을 입으려고 했었다. 죽기는 싫지만, 죽을 만큼 다쳐서 이 조직을 탈출하고 싶었던 열망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미수로 끝나고, 그는 관심병사로 지정되었다. (사실 이것 이외에도 몇 차례의 자살 시도가 있었다. 공포탄 사건은 그중 하나였다) 관심병사로 지정된 이후, L 병장의 군 생활은 그야말로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관리 체계에 편입되어야 했다. 각종 상담이란 상담은 다 받았으며, 정신과에 들락날락하게 되었다. 적응 장애 의심 증상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L 병장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자신이 더 심한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을 꾸준히 받아먹어야 했다. L 병장은 약의 효과가 그다지 없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먹는 그 순간만큼은 왜인지 진정이 되었기 때문에 한때는 약을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먹기도 하였다. (혹시나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때는 증상이 심각해져서, 그는 성남에 있는 국군 병원 정신과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곳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렸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 결과 부대에서는 L 병장을 둘러싼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완전히 미쳤다느니, 아픈 척한다느니 다양한 소문들이 주위에서 들려왔다. L 병장은 이 소문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굉장히 힘들어했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엇인데 남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한다는 말인가? 자신들이 L 병장이라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으면서, 도대체 무슨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느니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고 L 병장은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L 병장은 이렇게 그들에게 말을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판단했다, 오히려 L 병장이 정상이고,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마음대로 판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L 병장은 그래서 소문을 들을 때 마다 무어라고 변명하기도 싫었고, 가슴앓이만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L 병장은 지금도 고통스러워하고 군대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렇게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데,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L 병장은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들의 총기 분해 결합 훈련이 시작된 것이었다. L 병장은 그것을 보고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총을 빼앗아, 상황실로 달려가 실탄을 꺼낸 다음 '탕!'하는 소리와 함께 생을 마감하면 참으로 여러 면에서 용감하지 않겠냐고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걸 실제로 할 수 있는 깡도 없었고, 실제로 한다고 해도 열쇠를 여는 데 시간이 걸려 금방 제지당할 것이 뻔했다. 그저 L 병장의 한 가지 희망 사항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교육시간이 지났다. L 병장은 총기를 다시 집어넣는 것을 도와준 다음,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할까 하고 또다시 고민했지만, 가뜩이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청소시간 전까지 또 자기로 했다. L 병장은 다시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우면서 '이번에는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숙면이란 꿈을 꾸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꿈을 꾸어도 꿈을 꾸는 순간, L 병장에게 숙면은 저 멀리 날아가는 것과 같은 존재였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꿈을 꾸지 않을 정도로 자야 푹 쉴 수 있다고 경험상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꿈을 꾸지 않기를 고대하면서 또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또다시 꿈을 꾸고야 말았다. 그 꿈은 요즈음 들어 가장 기묘한 꿈이었다. 여기에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L 병장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겁을 먹으며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그의 체력은 저질이었으나, 그걸 뛰어넘게 할 정도로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커다란 개였다. 본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림자로 보아서는 매우 큰 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L 병장은 그 개가 자신을 집어 먹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왈왈!'하면서 다가오는 개의 체력은 무궁무진했는데, L 병장은 비축된 체력은 점차 바닥났다. 그리하여 결국 L 병장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개한테 잡아먹히고 말았다. 개는 L 병장을 말 그대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L 병장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너무 지쳐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자신의 살이 뜯기는 모습을 그림자를 통해서 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L 병장에게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개한테! 지고야 말다니!"

"정말로 능력 없다, 의지도 없고, 저렇게 작은 개한테 먹히는 것도."

"그러니까, 당해도 싼 거야, 저렇게 먹히는 건"

L 병장은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이게 작은 개라고?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큰데? 저 사람들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군.' 하지만 L 병장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진짜 남들이 보기에 작은 개면 어떻게 하지? 정말로 약한 존재한테 내가 굴복한 거라면 어떻게 하지? 이거 참 그러면 저들의 말이 참으로 맞는 게 아닌가! L 병장은 다시 개를 보려고 눈알을 굴렸다. 그 순간 흰 이빨이 다가오더니 그의 눈알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L 병장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주변에 수군거리는 인물들과 눈알을 찹찹하고 먹고 있는 개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꿈은 청소시간이라고 후임이 깨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L 병장은 후임이 깨워서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다.

청소시간에는 헌병이 하는 일이라고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밖에 없었다. 그것도 가위바위보 같은 게임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 몰아주고는 했으니, 거의 안 하는 날도 많았다. 그날도 운이 좋아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건 때로 L 병장에게 죄책감을 주었다. 하는 일도 없는데, 이렇게 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L 병장은 독서실 구석에 앉아 (청소에 방해가 되므로) 조금 전 그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그 꿈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L 병장은 자신의 고통이 그렇게 형상화된 게 아닐까라는 결론을 내렸다. 개는 그 고통이고, 잡아먹히는 건 고통에 정복당한 나이고, 비웃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비웃는 사람들이고. 그런데 어찌하여 그 꿈은 의식이 없어졌는데도 날 깨우지 않고 그 고통과 비웃음 속에 계속 머물게 했을까? 무슨 이유로? 그것은 생각해도 간단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L 병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고민하다 보니 9시 55분이 된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곧 있으면 저녁 점호시간이었다. 생활관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그는 생활관으로 가 멍하게 앉았다. 피곤했다. 오늘 계속 자기만 했는데도 계속 피곤했다. 마치 그 꿈들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그러니까 꿈을 꾸지 않고 현실에서 그 행동들을 한 것처럼 지나가서 계속해서 피곤함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저녁 점호를 받고, 그는 곧 군복으로 다시 갈아입기 시작했다. 1시간 뒤면 근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하루를 마무리할 시점에, L 병장은 하루를 시작했다. 옷을 다 입고 나니 50분 정도가 남았다. 통상 10분 전까지 내려가서 근무 교대하는 것이 예의였으니 실제로는 40분이 남은 것이다. 그날 마침 연등이 있어서 사지방에서 SNS를 잠시 하다가 독서실에 들려 야간 근무 동안 할 것을 챙겼다. 5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 자투리 시간에 L 병장은 잠시 멍을 때리면서 앉아있었다. 피로함이 밀려왔다. 오늘은 왜 그런지 몰라도 피로함이 자꾸 몰려왔다. 마치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눈처럼 그러했다. (그 5분 동안 L 병장은 조금 전의 꿈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으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문제라 당분간은 미해결 상태로 두기로 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피곤함이 몰려오는 데도 야간근무에는 생각보다 존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야간근무에 처음 투입된 경우나, 아주 피곤한 날에는 그도 금방 곯아떨어지고는 했으나, 대부분은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극도로 피곤하기만 했다. 당직사관 대다수가 근무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는 실컷 조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L 병장은 유독 그러지 못하였다.

시간이 되자 그는 후임을 이끌고 야간 근무에 들어갔다. 근무에서 그의 후임과 L 병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4가지 밖에 없었다. 첫째는 1시간씩 교대하면서 CCTV를 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정해진 시간에 순찰을 가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아침 시간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침에 초소근무자들이 먹을 밥을 싸주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이 그들의 근무가 끝나기 전에 끝나버려서, 밥을 퍼주지 않으면 그들은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 이외에는 그저 할 거 하면서 앉아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L 병장이 먼저 CCTV를 보기로 했다. 대부분 당직사관이 CCTV를 보는 일에도 참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 나지 않게만 한다면, 딴짓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실상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런 당직사관이었으나, 무슨 일인지 L 병장은 오래간만에 제대로 보기로 했다. CCTV를 볼 때마다, L 병장의 머릿속은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찼다. 주로 군대에 대한 생각들이었는데, 지금까지 살펴본바 그것들이 결코 긍정적인 생각들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L 병장의 머릿속에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착착착'하는 소리와 함께 그 걸음은 강해졌다. 강철이라도 달린 듯 착착 소리는 점차 커져만 갔다. 그것이 머리에서 울려 퍼지자 L 병장의 정신은 고통스러워했다. '제발 그만'이라고 외쳤지만, 군화 소리는 오히려 점차 더 커져 왔다. 그리고 곧 L 병장을 덮쳐왔다. 한 무리의 군인들은 L 병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마구 그를 짓밟고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 무리가 다 지나갈 무렵 막줄에 있던 병사 2명이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더니 강제로 오와 열을 맞추도록 하면서 무리에 합류시켰다. 그렇게 그의 정신은 군대의 한 무리에 포함되어 좀비처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무리에 동화된 것처럼 힘차게 걸어 나갔다. 그때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태극기가 게양되더니 일제히 모두 정지해 경례했다. 그러면서 외쳤다. '위대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L 병장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생각을 하다니......."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현실 투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에는 공상도 있었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도 충분히 많았다. 방금 전의 생각도 당연히 그런 류라고 여길 수 있었다. L 병장은 자신이 군대에 잠식당하고 마치 조종당하고 있다는 게, 생각으로도 이리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참으로도 서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너졌다니. 군대라는 것이 자연인을 이리도 무너뜨리는구나! 도대체 군대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리도 무너뜨리는 건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근무에서도 이러하다면 L 병장은 자신이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그런 L 병장을 욕하고는 했다. 언급했듯이, 그들은 그가 그런 '척'을 하는 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일전의 이런 식으로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그것도 그들의 임의적인 가정뿐이었다.) 더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 L 병장의 경우였다. L 병장으로서는 무얼 더 어떻게 증거해야 할 지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로 군대가 힘들었고 자살시도도 했다. 심지어 병원에 장기 입원도 했었다. 그 이후에는 많이 그 사람들의 의견을 흘려들은 편이었으나, 여전히 여기서 수군, 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유로 L 병장은 군대에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잘해주는 간부들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물론 이것은 L 병장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고, 금세 생각을 철회했다) 그 정도로 L 병장은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그냥 우울하고 가라앉았던 것들이 분노의 성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 나던 시절에서 짜증과 분노가 끊임없이 나던 시절로 바뀌게 된 것이다. 속으로는 늘 부글부글 끓었던 적이 많았지만, 워낙 소심해서 '아직' 바깥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만일 기회가 있다면 L 병장은 임 병장처럼 총기 난사를 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후임이 L 병장에게 다가와서 '교대 시간 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L 병장은 CCTV 감시 근무 일지에 '특이사항 없음'이라고 적고 교대했다. 이것을 야간근무 시간 동안 계속 반복했다. 교대했다가 쉬다가, 그러다 문득 L 병장은 시계를 보았는데 벌써 순찰시간이 되었다. L 병장은 졸고 있는 후임을 깨우고서 순찰 갈 채비를 하였다.

순찰 장구를 차고, 그는 당직사관에게 보고하고서는, 곤봉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는 총기를 꺼내야 하지만, 눈이 많이 와 미끄러워 넘어지면 다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곤봉을 꺼내기로 한 것이었다. L 병장은 한쪽에는 탐조등을 매고 가슴 쪽에는 무전기를 장착하고 후임과 순찰에 나섰다. 야간이라 밤이 매우 깜깜한 가운데, 탐조등을 켜고 첫 번째 순찰 코스로 향했다. 도착하고 나서, 순찰함을 열었다. 순찰표는 없었다. '역시나.'라고 L 병장은 생각했다. 제대로 순찰표를 넣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간혹 지적사항이 나오거나, 제대로 하는 몇 사람만이 순찰표를 넣고는 했다. 어차피 순찰이야 매번 하는 것이었지만, 대체로 순찰표가 없을 때가 편했다. L 병장과 후임은 어두운 부대 안을 계속해서 걸었다. 그는 이 순간이 마치 자신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깜깜한 밤, 빛은 드물게 찾아볼 수 있던 밤. 희망 없어 보이는 자신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탐조등만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는데,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느꼈다. 정말이지 우울한 일이었다. 누구나 마음에 등불 하나씩 달고 산다는데 L 병장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어 보였다. 너무나도 깜깜한 마음이어서, 그곳에 빛이 비친다면, 갑자기 환해져서 익숙해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이 어떨 때는 너무 낯설게도 느껴지고,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 만나자고 하더라도,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정말로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만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느새 순찰코스를 다 돌고, 당직사관에게 보고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 L 병장이었다. 장구를 해체하고 시계를 보았다. 근무가 마무리될 때까지 3시간 정도가 남았다. CCTV를 두어 번 보고, 태극기를 게양하고, 초소 근무자를 위해 밥을 싸주기만 하면 그의 하루는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CCTV를 보는 일은 금방 끝났다. 모두 졸고 있는 상황실에서 혼자 깨있어서 적막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여하튼 이제 CCTV를 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L 병장은 '태극기 게양하고 하번하겠습니다.'라고 당직사관에게 보고한 다음 상황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가서 게양대의 줄을 풀었다. 후임이 태극기를 가져왔다. 태극기를 조심히 묶고서 올리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태극기를 보니 L 병장은 속이 약간 울렁울렁한 기분이 들었다. 태극기를 보면 항상 그랬다. 예전에는 그러한 감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랬다. 태극기가 과연 무엇이던가. 이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상징이었다. 군대에서 아끼고 아끼던 그 대한민국의 상징. 그러므로 L 병장은 군대에 대한 혐오를 가지면서, 태극기에도 어느 정도 그 감정을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L 병장은 '태극기를 가장 짓밟던' 놈들이 태극기를 숭상하는 모양새를 보고 꼴이 너무 우스웠다. 태극기를 숭상하는 국군. 그리고 국군을 싫어하는 L '병장'. 참으로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태극기에 아무 감정이 없던 그에게 태극기에 감정을 투영하기 시작하면서, 태극기도 그에게 하나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가서 마치 나치의 깃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극단적인 생각들을 버리기는 했지만) 또한 그걸 태워버리겠다고 나름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그건 아니'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태극기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들이 완화되기는 했으나, 태극기에 대해 울렁거리는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마 제대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이것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L 병장은 생각했다. 그다음 L 병장은 아침을 먹고 초소 근무자들이 먹어야 할 도시락을 쌌다. 서둘러서 싼 다음에, 8시 30분까지 가만히 약을 먹기 위해 기다리면서 사지방에서 SNS를 즐겼다. 8시 30분이 되자 L 병장은 사무실로 내려가서 약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삐걱거리는 침대로 올라가서 바로 자기 시작했다. 드디어 L 병장의 하루가 끝이 난 것이었다. L 병장은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 근무 도중에 실수한 것도 없었으며(실수할 거리가 있겠느냐마는) 좋은 꿈도 꾸었으며 삼시 새끼도 다 챙겨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