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연애칼럼] 나는 나쁜 여자친구였다.
내가 나쁜 여자친구였을 때
누구나 이별을 하면 자기 위로하기를 좋아한다. 친구들을 만나 그 때문에 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며 헤어진 연인의 뒷담화를 하고, 마치 나의 잘못은 없었던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 내가 찼든 차였든 이별을 합리화하고 싶은 안쓰러운 심리일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성숙하고 자기 위로에서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면 문득 깨닫게 된다. 아… 내가 참 나쁜 년이었구나… 이 글은 나의 개인적 연애사에 대한 글, 그리고 나처럼 낮은 자존감 때문에 연애를 잘 하지 못했던 다른 여자들 모두를 위한 글이다.
남자는 나의 쓰레기통
나는 예전에 남자친구를 나보다 낮은 사람으로 여기곤 했다. 본인의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상대방을 낮춰 생각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높히려는 시도였다. 이런 여자들은 보통 자기가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집에 데려다 줘야지, 당연히 데이트 계획은 남자가 짜야지, 당연히 내 가방 들어줘야지,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원래 여자친구한테는 다 이렇게 해줘야지!
이 여자들은 남자친구가 쓰레기통인 줄 안다. 감정 쓰레기통. 남자친구와의 관계와 상관 없는 일이든 있는 일이든 자기 기분이 나쁠 때 남자친구에게 심한 말을 퍼붓는 것은 기본이며 시도 때도 없이 틱틱대고 (물론 남자친구에게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ㅋ음ㅋ) 상대방을 막 대하며 일단 내 기분이 나쁘니까 니가 무조건 다 받아줘야 한다는 논리없는 논리를 펼친다.
이런 여자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내 기분이 나쁜데 어쩌라고.", "아 그럼 누구한테 기분을 풀어.", "그냥 좀 받아주면 안돼?" 이들은 보통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며 지극히 본인 위주의 연애밖에 할 줄 모른다.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이런 여자친구를 처음에는 이해해 주고 싶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니 우쭈쭈 좀 받아줄 수 있겠지만 이것이 무한 반복되면 결국에는 여자친구의 눈치만 보다가 결국에는 눈칫밥쟁이 호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존감이 높은 남자들은 너같은 년 따위 하고는 금방 떠나버린다. 그러면 이 년은 지가 잘못했다며 질질 붙잡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호구를 찾아 떠나자 여행을~ 하… 나의 흑역사.
또, 이들은 연애를 드라마틱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일을 갖고도 크게 싸움을 붙이고 그 싸움을 결국 남친이 빌어서 해결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같은 타입.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억지로 심각하게 만드려는 느낌? 쓸데없이 자주 울기도 하고 아무튼 드라마틱한 화해 장면을 즐긴다. 싸웠을때 잘못을 누가 했든 열 중 아홉 번은 본인이 사과해서 풀어야 하는 남자분들 정신 차리시고 더 좋은 여자 만나러 떠나시길... (진짜 열 중 아홉 번을 자기가 잘못했던 경우는 제외^^)
*이런 여자들을 남자로 치환하자면 쌍마초오빠병 걸려서 “여자가 남자 기를 세워줘야지!” 따위의 말을 지껄이는 XX들이 계시겠다.
나는 졸라 착한 여자니까
나는 1번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갔다. 흑역사 제조기였음. 1번과는 반대의 방식으로 낮은 자존감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내 자존감을 높여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가 아니라 “내 잘난 남자친구를 통해서 나도 잘나질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 이런 답답한 사람들이 또 없다. 착한 병 걸린 여자들. 그렇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하녀병에 걸려 있었다.
이 병에 걸린 여자들은 현모양처라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판타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일단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자존감이 낮고, 자아성찰을 잘 하지 못하며 주변인들에 따라 스스로의 호불호가 쉽게 갈리는 줏대없음을 종종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단순하게도 좋은 여자친구 = 착한 여자친구라는 등식을 굳게 믿어버렸다. 본인이 순종적이고 여성스럽고 참한 여자이고 싶다는 환상에 빠져서 남자친구를 오냐 오냐 키운(?)다. 쓸데없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친구 뻘짓 다 받아주다가 결국엔 지가 지쳐서 헐크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를 지가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이상한 자기 학대를 하며 그걸 또 굉장히 뿌듯하게 여긴다. 그러다가 그 뒷바라지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할 경우 (여기서 대가란 경제적 대가, 심리적 대가, 사회적 대가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예를 들면 내가 너한테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아 등이 있겠다.) 진짜 조올라 빡친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 되고, 남자친구는 왜 그 동안 천사같았던 여자친구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고, 착한 병 걸린 여자친구들은 또 에휴 착한 내가 참아야지^^ 라며 착한 병에 더 심취하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들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주변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얘네는 항상 남자친구가 일순위라 여자 친구들과의 약속을 쉽게 여긴다. 그래서 결국에는 친구들을 다 잃고 남자친구에게도 차이는 불쌍한 꼴을 보이곤 한다. 나도 한 때 남자친구 말고 친구들을 전혀 만나지 않았던 안쓰러운 과거가 있다… 그럼에도 나와 계속 놀아준 친구들에게 이번 기회에 감사를.
남자들이 이런 여자들을 질려하는 이유는 일단 도대체 진짜 모습이 뭔지 알 수가 없기 때문. 처음에는 자기한테 잘 하고 여성스러워 보여서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게 가식인지 진짜 착한건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자꾸 부탁하지도 않은 선물을 사다주고, 도시락을 싸오고, 청소를 해주려 하고… 엄마인가? 흔히들 여자가 밀당을 못하면 남자가 질려한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진짜 이유는 밀당이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상대에게 질리는 진짜 이유는 줏대, 혹은 자존감에 있다. 싫을 때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리고 바쁠 때 바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리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연애를 하지 않기 때문에 밀당을 잘한다고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다들 밀당, 밀당 하지만 밀당 연습보다 자존감을 높히셔라.
아무튼 자존감이 낮은 여자를 만나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녀들은 결국 당신에게 기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외로 경제적인 기생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당신에게 돈을 퍼붓는 스타일이니까. 다만 심적인 기생을 한다. 그 기생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남자친구를 곧 자기라고 생각하는 남친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당신의 모든 취향이 그녀의 취향이 되고 (당신은 그녀의 취향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애초에 취향이 없었다.) 당신의 꿈이 그녀의 꿈이 되고 당신의 가족이 그녀의 가족보다 그녀에게 더 중요해진다. 좋을 것 같다고?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에 식칼 꺼내들고 죽겠다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멋진 여자를 만나러 탈출하시길. 아, 참고로 이런 여자들은 자기와 비슷한 줏대없는 남자는 남자답지 않다며 또 싫다고들 하니 어쩌라는 건지 답이 없다.
이 글의 ‘그녀’는 전부 나 본인이다. 나는 1번같은 여자친구였던 적도 있고 2번같은 여자친구였던 적도 있고 1번, 2번보다 더 별로였던 여자친구였던 적도 많다. 흑역사를 열심히 쓴 뒤, 다행히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거치게 되었고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후로 심리 상담도 받고, 이런 저런 심적인 연습도 하며 몇 년 사이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 모자라지만 예전보다 더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해 몇일 전 남자친구에게 별 것 아닌 일로 일부러 싸움을 걸었다. 그가 져주기를 바라는 유치한 마음에서. 결국 정신 차리고 사과한 후에는참을 수 없는 자괴감과 불안함에 그가 이제 나를 떠나지 않을까 혼자 괴로워했다.
참 다행인 것은 몇 년 전의 나와는 다르게 이제는 그 불안함을 떨치고 다시 남자친구와 동등한 인격체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존감은 상대적인 것이라 어느 절대적인 기준을 두고 높다, 낮다로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 높은 사람, 이렇게 두 종류가 아닌, 자존감이 낮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과 자존감을 높히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나도 이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과연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지,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는지 한 번 돌아보길 바란다. 새해 목표로 건강한 연애를 하는 신녀성이 됩시다 여러분. 그리고 과거의 나를 너무 숨기려 하지 말고 이렇게 한 번 드러내 보이는 것도 정신 건강에 그다지 나쁘지 않다.
K에게 기고받은 글로, 최소한의 편집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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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글이 내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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