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윈스키와 무슬림 근본주의자의 기묘한 거울상
Yes, Yes, Yes가 No가 될 수 있을까?
슬라보예 지젝
번역 강영민, 김강기명
‘No는 No다’는 평론가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뉴웨이브 여성해방투쟁을 설명하려고 할 때 내리는 결론 중 하나다. 그런데 이 결론만으로 ‘행복한 성생활’(Happy sex life)이 가능해질까. 좀 더 미묘한 형태의 강요라면 어떨까. 여기 모범 사례가 있다.
“누군가에게 역겨운 복종을 강요하며 괴롭히는 일을 법적으로 해결한다고 해서 그 법이 곧 우리를 행복한 성생활로 인도해주는 것은 아니며 여론 재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틸만(역주)은 젊은이가 추구해야할 덕목이 ‘No’라는 모호한 부재(absence)가 아니라 ‘Yes, Yes, Yes’라는 열정적 현존(presence)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No는 No’란 말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신이 없을 경우에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가장 취약한 곳으로 밀려나 공격받게 될 것이다. 틸만은 “열정적으로 Yes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음, 잘 모르겠는데..’라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건 바로 No란 뜻”이라고 말한다.” (1)
어떻게 압력 속에서 말해진 약한 ‘yes’는 ‘no’랑 같은 뜻일 수밖에 없는지 등 이 인용문의 핵심 주장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적인 것은 저 “yes, yes, yes의 열정적 현존”이다. 거칠게 말해 (그러면 좀 어떤가?), 이 열정적 yes라는 조건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남성에 의해 눕혀지길 원하는 여성이 모욕감을 느끼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녀는 이제 “Please fxxx me!”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등급의 어떤 것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 외에 열정적 yes를 현존하게 할 더 모호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할 것 없이 분명한) 방법이 있단 말인가? 더 나아가, “행복한 성생활의 길”을 추구하는 일은 그저 헛되게 끝날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There is no such a thing). 섹스는, 그것에 내재한 이유들로 인해서, 종종 잘못되곤 한다. 상대적으로나마 “행복한 성생활”을 누릴 유일한 방법은 이 실수들이 그것들 자체에 대항해서 작동하도록 할 방법을 찾는 길 뿐이다. “행복한 성생활의 길”을 직접적으로 찾아내려는 것은 일을 망가뜨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두 파트너가 열정적으로 “예! 예! 예!”를 외치는 상상이란 지옥같은 일이다.
성관계를 포기할 권리에 이르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이 권리가 어떻게 새로운 폭력의 차원을 여는 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자가 나체로 발기된 채 서 있는 그녀의 파트너를 조롱하며 “당장 꺼져버려”라고 말한다면? 반대로 남자도 똑같이 한다면? 이보다 더 굴욕적인 경우가 있을까? 이런 교착상태에 대한 적절한 해결 방법은 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매너와 섬세함이다. 계약서에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는 것으로 폭력과 강압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는 성관계의 핵심 특징을 잃어버리게 된다.
원하는 걸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격정의 폭발이 공손함으로 가려질 때, 온건한 무력이 성적 친밀함으로 통할 때, 성관계는 이러한 순간들에 대한 무언의 이해와 기지라는 예외성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열정적인 “Yes, Yes, Yes”가 사실상 폭력과 지배의 마스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는 2014년 저서에서 “원하지 않는 관계였지만 거대한 힘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결론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며 날마다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며 “‘동의’의 사전적 의미는 뭔가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 나이에 그의 권력과 사회적 위치 앞에서 그 ‘뭔가’란 무엇일까? 그는 내 보스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파워풀한 남자였고, 나보다 27살이나 많았고, 뭐가 더 나은지 알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라고 썼다.(2) (역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동의했다기보다, 적극적으로 성적 접촉을 시작했다. 오히려 ‘동의’한 쪽은 거대한 힘의 차이(그녀에게 매력 포인트였을)를 가진 클린턴이었다. 그녀의 주장은 뭐가 더 좋은 지 잘 아는 훨씬 풍부한 경험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들이댐’을 거절해야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부여한 이 순결한 희생자 역할이 어쩐지 도덕적으로 표리부동한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정확히, 거의 대칭적으로, ‘강간범을 은밀하게 유혹한(도발한) 여자가 문제다’라는 무슬림 근본주의자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견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자가 도발해서 강간이 일어났다는 논리는 미디어에 자주 등장한다. 2006년 가을, 호주의 가장 명망있는 시니어 무슬림 성직자인 세이크 타지 딘 알-힐라리(Sheik Taj Din al-Hilali.역주)는 강간범이 수용되어 있는 감옥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지나가는 고양이가 먹어 치웠다면 고깃덩어리 잘못인가. 고양이 잘못인가?”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베일을 안 쓴 여성을 길가에 떨어진 고깃덩어리에 대입시킨 이 노골적 비유는 즉시 폭발적인 스캔들이 됐다. 그런데 이 논쟁에는 더 놀라운 전제가 숨어 있다. 남자의 성행위가 온전히 여자 책임이라면, 남자는 고깃덩어리를 본 고양이처럼 저항할 수 없는 성적 도발에 완전히 무기력한 성욕의 노예가 된다는 게 아닌가? 성행위에 남자가 완전히 무책임하다는 이러한 가정과는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여성의 공공연한 성적 매력을 강조한다. 성욕의 맹목적 노예가 아닌 절제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는 전제로 말이다.
여자에게 성행위의 책임을 온전히 전가하는 것은, 클린턴에게 모든 책임(주도권이 그녀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을 전가하는 르윈스키의 관점과 기묘한 거울상을 이룬다. 무슬림 근본주의자(역주)의 관점에서는 흉포한 강간범이라도 여자의 유혹에 속아 넘어간 무기력한 희생자다. 르윈스키의 관점에서 자신은 먼저 도발적으로 관계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희생자다. 물론 이 대칭은 오류다. 두 경우 모두 사회를 실제로 지배하는 권력자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윈스키 케이스 같이 무기력한 희생자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여성 해방과 전혀 관계없다. 그것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모독하는 스펙터클일 뿐이다. 그것은 남성이 주인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2) 인용
http://www.bbc.com/news/world-us-canada-43218355
역주
*에린 틸만(Erin Tillman) 캘리포니아의 데이트 상담사. 본인을 ‘데이팅 어드바이스 걸’(The Dating Advice Girl)이라고 소개한다. 동명의 웹사이트(https://thedatingadvicegirl.com/)를 운영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틸만의 상담 내용을 인용해서 게비 힌스리프(Gaby Hinsliff)가 가디언에 쓴 칼럼이다.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8/feb/14/carnality-and-consent-how-to-navigate-sex-in-the-modern-world)
*모니카 르윈스키가 배니티 페어(Vanity Fair magazine)에 ‘#MeToo시대에 백악관의 개스라이팅’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https://www.vanityfair.com/news/2018/02/monica-lewinsky-in-the-age-of-metoo)
*세이크 타지 딘 알-힐라리(Sheik Taj Din al-Hilali, 1942~ ) 호주 수니파의 전 리더. 사회 이슈에 논란이 되는 발언을 자주 해 2007년에 물러났다. 1999년에는 밀수죄로 형을 살았으며 시드니 대학에서 유대인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음모론 강연을 해 유대인 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무슬림이 여혐의 끝판왕이라는 한국의 편견은 사실과 다르다. 본문의 고깃덩어리 비유는 문제가 있는 근본주의자의 발언일 뿐이다. 이슬람 율법에서 강간은 신성을 침해한 심각한 범죄다. https://en.wikipedia.org/wiki/Rape_in_Islamic_law
아래는 영어 원문
CAN EVEN A "YES, YES, YES" MEAN "NO"?
Slavoj Žižek
When commentators try to resume the results of the ongoing new wave of the struggle for women's emancipation, one of their conclusons is that “no means no” is not enough to lead a “happy sex life” since it still leave the space open for more subtle forms of coercion – here is an exemplary case of this line of argumentation:
“Badgering someone into queasy submission might technically be within the law, but it is not the road to a happy sex life and it may no longer protect a man from public censure. What young men should look for, Tillman argues, is not the potentially ambiguous absence of “no”, but the enthusiastic presence of a “yes, yes, yes” or affirmative consent. “In 2018, ‘no means no’ is totally antiquated. It puts all the pressure on the person in the most vulnerable position, that if someone doesn’t have the capacity or the confidence to speak up, then they’re going to be violated,” she says. “If somebody isn’t an enthusiastic yes, if they’re hesitating, if they’re like: ‘Uh, I don’t know’ – at this point in time, that equals no.””
One cannot but agree with all the critical points in this passage: how a weak “yes” under pressure equals “no,” etc. What is problematic is “the enthusiastic presence of a ‘yes, yes, yes’” – it is easy to imagine in what a humiliating position this condition can put a woman who, to put it bluntly (and why not?), passionately wants to get laid by a man – basically, she has to perform an equivalent of publicly stating “Please f*** me!”… Are there not much more subtle (but nonetheless unambiguously clear) ways to do this? Furthermore, if one looks for “the road to a happy sex life,” one looks for it in vain for the simple reason that there is no such thing: things always, for immanent reasons, go wrong in some way in sex, and the only chance of a relatively “happy sex life” is to find a way to make these failures work against themselves. Directly searching for “the road to a happy sex life” is the safest way to ruin things, and the imagined scene of both partners enthusiastically shouting “yes, yes, yes” is in real life as close as one can get to hell.
Things get even more complex with the right to withdraw from sexual interaction at any moment - one rarely mentions how thsi right opens up new modes of violence. What if the woman, after seeing her partner naked with erected penis, begins to mock him and tells him to leave? What if the man does the same to her? Can one imagine a more humiliating situation? Clearly, one can find an appropriate way to resolve such impasses only through manners and sensitivity, which by definition cannot be legislated. If one wants to prevent violence and brutality by adding new clauses to the contract, one loses a central feature of sexual interplay which is precisely a delicate balance between what is said and what is not said. Sexual interplay is full of such exceptions where a silent understanding and tact offer the only way to proceed when one wants things done but not explicitly spoken about, when extreme emotional brutality can be enacted in the guise of politeness and when moderate violence itself can get sexualized.
If we go to the end on this path, we have to conclude that even an enthusiastic »yes, yes, yes« can effectively function as a mask of violence and domination. Monica Lewinsky recently said that “she stands by her 2014 comments that their relationship was consensual, but muses about the "vast power differentials" that existed between the two. Ms Lewinsky says she had "limited understanding of the consequences" at the time, and regrets the affair daily. "The dictionary definition of "consent"? To give permission for something to happen," she wrote. "And yet what did the 'something' mean in this instance, given the power dynamics, his position, and my age? /.../ He was my boss. He was the most powerful man on the planet. He was 27 years my senior, with enough life experience to know better."”
True, but she did not just consent, she directly initiated sexual contact, and it was Clinton who “consented,” and the “vast power differential” was what probably a key part of his attraction for her. As for her claim that since he was an older experienced man, he should have “known better” and reject her advances, is there not something hypocritical in this self-ascribed role of an inexperienced victim? Do we not fund ourselves here at the exact, almost symmetrical, opposite of the Muslim fundamentalist view according to which a man who raped a woman was secretly seduced (provoked) by her into doing it? Such a reading of male rape as the result of woman's provocation is often reported by the media. In the Fall of 2006, Sheik Taj Din al-Hilali, Australia’s most senior Muslim cleric, caused a scandal when, after a group of Muslim men had been jailed for gang rape, he said: »If you take uncovered meat and place it outside on the street /…/ and the cats come and eat it… whose fault is it – the cats’ or the uncovered meat? The uncovered meat is the problem.« The explosively-scandalous nature of this comparison between a woman who is not veiled and raw, uncovered meat distracted attention from another, much more surprising premise underlying al-Hilali’s argument: if women are held responsible for the sexual conduct of men, does this not imply that men are totally helpless when faced with what they perceive as a sexual provocation, that they are simply unable to resist it, that they are totally enslaved to their sexual hunger, precisely like a cat when it sees raw meat? In contrast to this presumption of the complete lack of mal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sexual conduct, the emphasis on public female eroticism in the West relies on the premise that men are capable of sexual restraint, that they are not blind slaves of their sexual drives.
This total responsibility of the woman for the sexual act strangely mirrors the Lewinsky view that, although the initiative was fully on her side, the responibility was fully Clinton's. In the same way that, in the Muslim fundamentalist view, men are helpless victims of woman's perfidious seduction even if they commit a brutal rape, in the Lewinky case, she was a victim even if she provicatively initiated the affair. The symmetry between the two cases flawed, of course, since in both of them men are in the actual position of social power and domination. However, playing the card of a helpless victim in such a case as Lewinsky's is a self-humiliating spectacle which in no way helps women's emancipation – it merely confirms man as the master.
[파벨라 동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