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1. 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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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1. 9 (목)

■ 에베소서 4:17-24

[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자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4:2-3). 즉, 독선과 독단으로 행하며 그 언행에 대하여 무절제한 자의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도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결단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지적으로 매우 약한 존재들이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해야 하며, 끊임없이 제자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20). 이는 단회적인 훈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노력하는 삶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우리가 좇아아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이방인의 모습, 즉 어두운 총명과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있고, 자신을 방탕에서 방임하는 것과 모든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것은(18), 절제와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와 오래참음과 평안과 형제간에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성도의 삶과는 대조적인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삶의 목적도 결과도 다르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가 이방인과 같이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된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딤전4:1-2).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묵상하고 성품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방탕한 자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새로움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법적으로 의인된 것과는 별도로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이 세상과는 구별된 생활을 통해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 말라"고 하며 이것을 주 안에서 증언한다고 합니다(17). 증언이라는 실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즉, 허망한 것이란 우상숭배를 말하며, 우상숭배와 같은 허망한 것으로 좇지 말고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의 증언도 이방인들과 같이 없어질 허망한 우상들 아닌 영원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들은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입니다(18).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터 분리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받아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깨달아 좇아가는 성도들과 달리(1:8-9), 방탕함과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자들입니다(19).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행동에 제한받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려고 하며 이는 방탕 속에 스스로를 방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져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나 두려움을 모르고 정욕을 좇아갑니다. 결국 그들은 감각이 없는 자들이 되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며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입니다(골1:21). 그러나 말씀을 들으며 양심에 찔림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리 떠나있는 자들과 같이 무감각한 자가 아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의 양심에 호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으며 내 양심에 찔림을 느낄때, 그러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비난하거나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신앙양심이 살아있음에 안도하며,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다시금 인도하시려는 성령의 역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길을 통해 참된 성도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20). 세상에서 함께 살며 같은 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방인의 생활과 성도의 생활은 그 방향성도 다르며 목적도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철저한 훈련과 경륜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는 이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우상 앞에 절하며 숭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분의 제자로서의 실제적인 삶을 통한 체득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증거합니다(23). 칼빈은 옛사람이란 죄로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거듭나기 이전의 행실과 성격, 그리고 삶의 태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죄인이었던 옛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인간의 죄성을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과 구습을 따라가는 옛 사람은 결국 썩어질 것으로 영원한 생명과는 상관없는 자들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자들의 삶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2:3). 그러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은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참된 성도의 모습이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성숙함'을 이루는 일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며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0).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제자도를 이루어가는 것이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육욕을 따라 절하며 숭배하는 우상을 따라가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상을 대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실체이며 구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함께 지는 것이며,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실제적인 사역으로서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와 동행하며 함께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바울과 같이 가장 가치있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아 증거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나의 기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직도 옛 사람의 구습을 좇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허망한 것을 좇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 같은 방식의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지음받은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옵시고, 성경지식만을 자랑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말씀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