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례 (유복녀)

in #kr-story7 years ago (edited)

아기가 태중에 그 아비가 세상을 떴다. 태아가 사내이면 유복자 라 하고 여식이면 유복녀 라 한다.

그녀의 본명은 최 행림이다. 천형의 슬픈 업보로 아비를 볼 수 없는 운명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유복녀라 불렀다. 유복녀, 유복녀 하다 보니 발음상 유봉례 가 됐다. 그녀는 부유하지도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건강하게 쑥 쑥 잘 자랐다.

죽은 아비를 닮았는지, 둥글 넓적 한 얼굴에 크고 서글서글 한 눈매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평범 한 얼굴인데 도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뼈대가 사내처럼 굵은 탓인지 힘도 좋아 일도 잘했다.

산에 올라 가랑잎을 긁어모아 큰 둥치를 묶어 이어 내렸고 밭으로 논으로 또 바닷가로... 그녀의 가는 곳마다. 맑고 울림 있는 목소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웃겼다.

그녀 나이 이십 세 되던 해, 그 집 뜰아랫채에 30대 젊은 부부가 세 들었다.

시골 마을에 무슨 세입자냐? 할지 모르지만 옛날엔 그랬다. 5살 된 여자애를 키우고 있었는데 부부가 하나같이 허여 멀 금하니 잘생겼는데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도대체 하는 일 없이 먹고 빈둥덴다.

어느 일손 바쁜 농가에서 일 좀 하루해 달라고 갔더니 부부가 똑같이 '우린 일을 할 줄 몰라요'하더란다. 기가 막힌 농가 집에서 하루는 봉례 어머니께 물었다.

'봉례 엄니, 아래채 새댁 네는 대체 뭘 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유?'

'나도 몰라요~'

사실 봉례 어머니도 몰랐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두 부부는 소매치기 일당이었다. 5일 장마다 다니며 부부 행세로 여자는 바람잡고 남자는 농민들의 소 판돈, 고추 판돈 등 을 갈취해서 편히 먹고사는 인간 들 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봉례 어머니와 오빠 최 창욱은 큰댁에 제사가 있어 집을 비우게 됐다. 봉례만 혼자 남아 밤늦게까지 바느질 등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안방 아랫목에 요를 깔고 옷을 벗어 햇대에 거는 등, 움인 후 방에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아래채 젊은 남자는 아까부터 마당에서 방안 불빛에 비쳐 나오는 창호지 문의 봉례의 실루엣을 훔쳐보고 있었다.

봉례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걸 본 그 남자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음~ 봉례...'

하고는 자기네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는 그의 손에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는 칼을 들고 자기네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는 아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일으켰다.

'어마, 자기 왜 그래!' 경악하는 아내의 눈앞에 식칼을 들이댔다. '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여보! 잘못했어 잘못했어, 무조건 잘못했어. 왜 그러는데? 뭣 땜에 그러는데!? 살려줘요. 여보~'

'지금 안채 주인댁엔 봉례 혼자 있다.'

'아~ 알아. 엄마 오빠는 큰댁 제사 몰러 갔어'

' 지금 봉례 하고 나 하고 한번 붓쳐주라'

'어떻게... 그걸 어떻게...?'

'그건 네 수단에 달렸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하룻밤 만 자 달라고 사정해봐, 안되면 다 죽여 버린다.'

'알았어, 가서 말해볼게. 하지만 그 어린 것을...'

' 스무 살이 어리냐? 한참 꽃물이 넘칠 때지...'

여자는 떨리는 다리로 후들대며 봉례 방 앞에 섯다.

'봉례 자니?'

'아직 안 자요. 언니...'

' 나 좀 들어가도...?'

'네 들어오세요.'

방에 불이 켜지고 여자는 봉례와 마주 앉았다.

'봉례야...'

'왜? 언니.'

' 나 좀 살려다오...'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우리 집 저 남자가... 저 남자가 너와 하룻 밤 자게 안 해주면 날 죽인단다. 봉례야'

'세상에... 그런 법이... 그런 게 어딨어! 언니!'

'저 남자 무서운 사람이다. 감방에서 몇 번 갔었고 죽인다면 죽이는 사람이야. 하룻밤만 자다오.'

'저 남자 지금 방문 밖에 와 있다. 딱 한 번만... 아무도 모른다. 비밀은 지킬게... 부탁한다 봉례야.'

여자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봉례의 말도 듣지 않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여자가 나오자 기다리던 사내가 방으로 들어섰다. 봉례는 벌떡 일어나 방구석으로 피했다. 사내는 봉례를 끌어당겨 안았다. 반항하는 봉례를 번쩍 안아 눕히고 이어서 한 몸이 됐다. 여자는 마루 위에서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남녀의 숨 가쁜 실랑이 끝에 방안 불이 꺼지고... '아~악' 하는 봉례의 비명에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 저~악귀 같은 놈, 봉례야... 미안하다...'

단 하룻밤뿐이라 하던 년놈의 약속과는 달리 그들의 정염은 계속됐다. 봉례가 산에 가면 긁어모은 가랑잎 더미 위에서 둘은 합쳤고 어머니와 오빠가 들에 나가면 둘은 부엌 나무청에서도 뒤쪽 곳간방에서도 몸을 부딪쳤다. 두 사람의 밀회를 돕느라 여자는 아일 데리고 나가 두 사람이 아래채를 이용하도록 했다.

이제는 봉례가 남자를 더 원했고 남자가 하루만 찾지 않아도 정염을 이기지 못하고 몸 부림 쳤다. 하나님은 더러운 애욕에도 축복을 내리심 인가? 봉례의 뱃속에 씨가 심어졌다.

'봉례야... 너는 처녀야, 처녀 몸으로 어떻게 애를 낳니? 애를 지우자.'

여자는 두 사람의 통정은 묵인하면서도 봉례의 출산은 막으려 했다. 결국 유산 수술을 받았다. 유산의 후유증인지 봉례는 엄청난 하혈을 했다. 재래식 변소의 똥간에 쏟아진 핏물들을 어머니가 보지 못할 리 없다.

' 말해라, 변 소간의 핏덩이들이 다 뭣이냐? 설마 달거리를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머니의 매서운 추궁에 봉례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어머니는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 어찌한다냐? 저 불쌍 한 것, 어찌 살아가야 한다냐?!...'

그 날밤 봉례 어머니, 아들 창욱을 조용히 불러 앉혔다.

' 야~야. 봉례 저것이 큰일 냈다.'

'큰일이라니요? 무슨 큰일이오?'

' 저 아랫방 놈 한티 당해 버렸단다.'

'언제요?'

'언젠지는 모르겠고 애새끼 꺼정 배서 긁어 냈다는 디... 며칠 됐나 보더라'

'저런 죽일 놈! 여편네까지 있는 놈이... 그래 여편네는 모르고 있었다요?'

'알았어도 그냥 묵인했나 보더라 지 서방 무서 봐서...'

' 저 년놈들을 내 쳐죽이고 말 거요. 이런 개 같은 새끼!!!'

창욱은 눈에 불을 켜고 황소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서는데 봉례 어미 창욱의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진다.

' 이놈아, 이 미련한 놈아. 더 소리 질러라. 더 크게 떠들어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듣게... 이놈아 봉례 앞길 아주 막아버릴래? 봉례 저년 목매달아 혀 빼물고 뒈지는 꼴 보려면 더 떠들고 더 큰일 저질러라 이놈아!'

' 그럼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요?'

' 가만있거라. 분하고 원통해도 이빨 사려 물고 가만있거라. 뒤처리는 내가 할 거니, 봉례 저년한테도 반절 책임은 있다.'

'으 흐흐....'

창욱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려치며 울부 짓는다.

며 칠 후 봉례 어머니는 봉례를 데리고 어두운 새벽길을 나섰다. 서울 가는 첫차 시간을 맞춰 가는 길이다.

'봉례야. 너는 이 동네 더는 발 걸음 하지 말거라. 나 죽었단 소리 들어도 오지 말아라.'

....!

'봉례야! 너도 사내를 알았으니, 혼자 살긴 어려울 께다. 누구를 만나 살던 이번 일은 잊고 새 출발하거라,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란 말이다.'

'봉례야 서울 가설랑 봉례란 이름 버려라, 너는 최 행림이다. 행복하게 살라는 이름이다.'

차에 오르기 전에 봉례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엄마를 본다.

'엄마...!'

' 그래 어서 차 타거라'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 잘 가거라 행림아...'

그 후로는 아무도 봉례를 본 사람이 없다.

봉례... 살아 있으면 지금 80대의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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