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장] 4화 -Replay

in #kr-pen7 years ago (edited)

오늘은 햇살이 기분 좋게 나를 깨운다. 숙면을 취했다.
소풍 가기 전날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그 설레임 보다 긴장된 상황의 피곤함이 컸나 보다.
오후 6시 30분 경기를 위한 아직도 시간은 많다. 이제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늘 시합당일에는 아무 훈련도 하지 않았다.
경기 전 스트레칭, 캐치볼, 불펜 피칭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마인드 컨트롤. 그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실패를 겪은 게 수백 번. 또 실패할 수는 없다.
나에게도 한번은 성공이라는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내가 그 동안 했던 노력들. 그 어떤 사람이 상상하던 나는 항상 그 이상을 했다고 자부한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고교 시절 특급 유망주.
고교야구 토너먼트 결승전에 올라 간 것 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했다.
경기장의 흙을 가져가 매일 울었다는 후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로 보상받기엔 나에게는 고교리그는 부족한 무대였다.
8강전의 3피안타 완봉승.
4강전 11이닝 무실점 12K. 연장 승부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결승전 3이닝 9타자 연속 삼진.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대회 MVP.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나의 것이었다.

늘 하던 데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2 KM 정도 걸었다.
간단히 청소를 하고, 뜨거운 물에 30분 정도 샤워를 했다.
물기를 정성스레 닦아내고, 알몸으로 침대 위에 앉아 명상을 한다. 언제나 그랬듯 1시간 정도.
잡생각을 없애고 오로지 시합에서 완벽한 투구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타자와의 첫 구는 항상 한가운데 직구.
기다리는 타자도 있고, 배트를 내미는 타자도 있다.
기다려도 원스트라잌을 먹고 시작하고, 배트를 내밀어도 생각보다
좋은 구위에 눌려 평범한 땅볼이 되거나 내야 플라이가 된다.

두 번째 공은 포수 사인에 맡긴다. 슬라이더, 커브, 커터, 체인지 업. 코너 워크 되는 직구도
문제없다. 쉽게 쉽게 승부하면 그만이다. 그만큼 내공은 자신 있다.
4이닝까지 노히트노런이다. 5이닝에 그만 빗맞은 안타를 내어준다. 상관없다.
커터로 병살타를 유도해 오히려 투구 수를 절약한다.
내가 상대팀 타자들을 틀어막는 동안 우리 팀이 점수를 낸다.
1점이면 충분하다.

6회부터 상대팀은 조바심을 낸다. 5이닝까지 1안타에 묶여있고, 1점을 뒤지고 있다.
경기가 쉽지 않음을 직감한 타자들은 성급히 배트를 내민다.
리그 정상급 포수 인범의 리드에 맞춰 쉽게 타자들을 요리한다.
8회까지 투구 수 97개. 2피안타 무 볼넷, 10탈삼진. 점수는 1대0 리드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다. 다소 의식했던 탓일까? 첫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한다.
투수코치가 올라온다. 불펜에서는 마무리 투수가 몸을 풀고 있다.
내 의사를 전달한다. 괜찮다고. 이대로 마무리하겠다고.
투수코치가 내 의사를 존중해준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로진팩을 손에 묻히며 심호흡을 한다.
첫 구는 역시 빠른 직구. 전광판에 152 KM 가 찍힌다.
아직 내 공은 살아 움직인다. 슬라이더로 두 번째 승부 구를 던진다.
타이밍을 뺏긴 타자는 유격수 쪽으로 공을 보낸다. 깔끔한 병살타. 이제 하나 남았다.
역시 빠른 직구. 원스트라잌. 느린 커브. 투스트라잌. 바깥쪽 꽉 찬 직구 삼 구 삼진.
완봉으로 경기를 끝낸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포효한다.

긴 명상을 끝내고 스타디움으로 출발했다.
다시 한번 나는 도약할 수 있다.
그간의 고생은 이번 한번만 성공한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다.
경기 전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라커룸에 왔다.
후반기 첫 선발인 나를 여러 동료들이 격려해준다.
어느 정도 동료들과 교류가 끝났다. 이제 30분 전이다.
수건을 머리 위에 덮고, 조용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때보다 완벽하다.
3달여만의 선발 기회. 가슴이 벅차 오른다.

'올해 마지막일지도 몰라. 몇 번의 기회가 있을 거야.. 그렇게 되 서는 안되지만,
그 기회마저 살리지 못한다면..'

갑자기 정훈이의 음성이 Play 된다.어??..지금까지는 완벽했는데.
심장이 다시 요동친다. 젠장. 또 시작인 건가?
아침부터 준비한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 되기 직전이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다.

"우혁. 너는 가슴이 문제야."

음악 볼륨을 높인다. 불안한 마음도 커진다.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
도망갈 곳은 없다. 도저히 불안한 마음에 복도로 나와버렸다.
어떻게 마음을 진정할 수 있을까? 그저 불펜피칭처럼 던지면 되는데.
모든 것을 계획한대로 실천하면 되는데.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데.

복도에는 갖가지 우승트로피들이 진열되어 있다. 2년 전인가?
우리 팀이 한국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의 트로피도 있다.
'기도를 해볼까? 저 트로피. 성공의 트로피를 보면서?'
트로피 옆에 그 우승을 만끽하던 샴페인도 보관되어 있다. 터트리다 만 샴페인.
호프집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들이켰던 맥주.
지금도 그때의 기분과 99프로 유사하다. 나도 모르게 샴페인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시합 준비로 다들 분주하다.
한 모금을 마셔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샴페인이라 괜찮다. 한 모금 정도는.
한번 더..

긴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또 침대 위다. 꿈을 꾼 걸까? 하루가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시합 전 그때인 걸까? 어떻게 된 일일까?



침대에 누어 천장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던졌을까? 천장에 그라운드를 그리고 투수 마운드 위에 선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지우개가 애써 그린 그라운드와 그 안의 선수들, 관중들까지 모두 지워버린다.
10번정도 반복해도 똑같은 현상. 몸이 뜨겁다. 식은땀 한줄기가 등을 타고 내려온다.

결국 포기하고 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아.”
“여.. 혁이..”
정훈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진다.

“그게 말이야. 어제 일 말이야.”
기억 못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내 모습을 친구에게 들킬까조심스럽게 다른 화제로 말을 이었다.

“몸이 욱신거리는 게 아무래도 마사지를 제대로 안 해준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너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그냥 해본 말이야. 이제 한 경기 남은 거지?”

순간적으로 핸드폰과 인터넷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 아주 적절한 도구.. 검색해보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연결시키지 않았다. 폴더폰..
손으로 열고 닫는 구형 핸드폰을 여전히 쓰고 있다.
야구 외적으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야구 뉴스를 본 것도 내가 첫 승을 기록한 몇 년 전이 마지막이다.
집에 컴퓨터도, 인터넷도 당연히 없다.
계획된 훈련으로 하루를 채워가는 나의 삶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한 경기라니? 정말 내가 좋아서 견딜 수 없다. 너..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렇게 까지 자신을 옭아맬 필요 없어. 너는 물론 한 경기만 잘 던졌다고
평가절하 할 수 있겠지만, 그 임팩트는 엄청났다고. 구단관계자들, 선수들 감독들까지
난리야 난리. 스포츠 뉴스에도 대서특필 됐다고.“

잘 던졌나 보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조금 슬프긴 하지만, 기분이 안 좋을 수는 없다.
행복감과 성취감이 조금씩 생겨난다.

‘분명 결과가 좋았다는 거지?’

전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스타디움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영상 분석 실로 직행해서 어제의 경기 내용을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했다.
결과는 내가 만들었지만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조금 이른 시간인지, 구단 시설에는 청소하는 분들 외에는 썰렁했다.
코치들이 이른 출근을 할 수 도 있지만, 승리한 다음날은 팀이 빡빡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영상 분석 실에서 능숙하게 어제 경기를 플레이 했다. Replay.
요즘은 각종 스포츠채널에서 그날의 모든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보여준다.
적당한 해설과 함께 야구팬들은 그 방송만 잘 챙겨봐도
어떻게 각 팀들이 승리를 했는지? 승부처가 어디였는지? 각 팀의 패인이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다.
나는 프로 첫 데뷔 전 잘 던졌던 8과 2/3 이닝 경기 외에는 영상을 잘 챙겨보지 못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내가 실패했는지 굳이 영상을 챙겨보지 않아도
뇌리에 깊게 박혀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Replay된다. 끔찍한 일이다.

정확히 샴페인을 마시는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상을 보니 무의식 중이지만 마운드에 올라서 몸을 푸는 모습이 보인다.
경기 전 내 모습이 잠시 클로즈 업 된다. 표정은 굳어 있다.
그 동안 실패해왔던 경기에서는 경기 직전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애써 웃는 경우도 있었다.
내 속 마음, ‘도망치고 싶어’ 를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뭔가 좀 비장해 보이기도 한다. 어제의 내 표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눈빛은 오로지 포수의 미트만 응시한다.

플레이 볼이 선언되었다.
초 구는 직구. 한가운데 들어간다.
두 번째 공도 직구. 포수의 미트에 공이 박히는 소리가 스타디움을 깨운다.
‘지금 한가롭게 떠들고 먹고 할 때가 아니야 관중들~
내가 어떤 공을 던지는지 똑똑히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포수가 타임을 걸고 올라온다. 아마도 사인이 맞지 않은 것 같다.
변화구를 요구했지만 직구를 던졌고, 사인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것 같다.
화면 속 나의 반응은 포수가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을 것 이다.

그 후로 정확히 40구를 직구만 던졌다. 4회 투 아웃까지 말이다.
포수가 사인을 내고, 자리를 바꾸고, 다시 올라와서 계속 무언가를 얘기해도 마찬가지다.
떨어지는 변화구를 의식하고 있다가
빠른 직구에 놀라는 포수의 모습도 몇 번 영상에 드러났다.
분명히 예리한 야구 전문가들, 시청자들, 관중들은 알아 챌 만큼 포수 사인 무시하고 직구만 던졌다.
결과는 4회 2아웃까지 2안타 무실점. 무 볼넷이다.

나의 압도적인 구위에 타자들은 당황스럽게도 눌려 있다.
이렇게 똑 같이 던진 적이 분명히 있다. 잠시 Play를 멈추고 기억을 되살려봤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지역예선에서 약 팀과 붙었던 적이 있다.
본선진출을 확정하는 경기였기 때문에 내가 선발로 올라갔다.
초 고교 급 투수의 공을 지역의 약 팀이 상대할 수 없었다.

4회 투 아웃까지 직구만 던졌다. 11개의 아웃카운트를 8K, 투수 땅볼 2개, 포수 플라이 1개로 잡아냈다.
4회 마지막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 첫 구 느린 커브를 시험해봤었다.
그 때 한창 연습하던 공이다.
결과는 좌월 솔로 홈런. 배트도 잘 휘두르지 못하던 약 팀을 상대로 1 피 홈런을 얻어 맞았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9회까지 전력투구, 변화구도 섞어가며 5회부터 노히트 노런으로 마무리했다.
의식이 없는 가운데 내가 던지는 공의 패턴은 그 때 그 경기와 동일했다.
무의식 속에서 그 경기를 끄집어 내어 Play 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필 그 경기 라니..’

어제도 4회 세 번째 타자와의 첫 공은 느린 커브였다.
그러나 타자는 완벽히 타이밍을 뺏겨 버렸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공을 보고 치는 타자는 거의 없다.
순식간에 날라오는 공을 쳐내기 위해서는
어떤 공을 던질 지 예측해서 휘둘러야 승리의 확률이 올라간다.
분명 직구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직구만 계속 던졌으니까 말이다.

타자가 원하는 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다려야 했지만,
느린 커브는 타자의 눈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만큼 참아내기 힘들다. 배트가 나왔다. 결과는 3루 빗맞은 땅볼.
그렇게 4회까지 이닝을 마무리했다.

‘휴..’ 잠시 정지시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공은 압도적이었다. 갑자기 힘이 생기는 약물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술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읽은 것뿐이다. 음주 투구.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런 거다.

타자와의 싸움은 5회부터 달라졌다.
포수 인범은 그냥 다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싸인은 필요 없다. 그저 날라오는 공을 캐치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으로 보였다.
뛰어난 반사신경이 아니면 어림도 없다.
마치 싸인을 낸 공이 들어오는 것처럼 내 공을 잡아 냈다.
직구와 변화구의 비율은 7:3 정도였다. 내가 평소에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투구 비율이다.
무의식 속에서도 규칙은 있고,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투구패턴들이 로딩 되었다.
결과는 볼 필요도 없다.

직구 하나에 눌려있던 상대 타자들은 예리한 변화구가 섞여 들어오자 맥없이 물러날 뿐이다.
9이닝 무실점 완봉승. 13K.
정훈이가 왜 힘주어 나의 강렬한 임팩트를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Replay는 끝났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 동안 지독히 훈련하고도 성과가 없었던 내 모습과,
술을 마시고 마치 기계처럼 던져내는 Replay속 내 모습이
그저 같은 나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런 결과는 그토록 그렇게 기다리던 것이었다.
벅차 오른 가슴은 뭉클한 기분을 계속 불러냈고,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린다.
이 좋은 결과를 직접 느낄 수 없었다는 너무 아쉬운 마음과,
꿈이 한 단계 이루어진 기쁨이 교차했다.

Replay 속 나는 당당하다. Replay 속의 나만 당당할 지도 모르겠다.
아쉬움과 행복함 사이에서 몇 초가 흘렀을까?
다시 앞길이 막막 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강심장 1화 : https://steemit.com/fiction/@kyungduck/1
강심장 2화 : https://steemit.com/fiction/@kyungduck/2
강심장 3화 : https://steemit.com/kr-pen/@kyungduc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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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조언해주시고 관심가져주셔서 정말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