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 왜곡" 과 "역사조작" 2
안녕하세요^^
올바른역사 이야기를 하고자하 는 @joey0513 입니다.
일본이 역사조작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역사조작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속국이었다는 열등의식에서 탈피하고, 국민들이 과거를 모르는 역사치매에 걸리게 하여 3류 사무라이들의 충견으로 만들어 광란의 살인시대로 이끌기 위해 시작되었다. 또 역사조작은 오늘날 일본인들이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이 다른 일본특유의 이중성을 고착화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조작에 의거 역사치매에 걸린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들의 광풍은 붉은 노을보다 더 붉게 물들게 만들었다.
1944년 7월 미 해병 2개 사단이 태평양의 일본 식민지 사이판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본군 수비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이 미군 1만5천명, 일본군 4만3천여 명과 민간인을 합쳐 7만5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7월 8일 살아남은 일본군병사와 민간인 수천 명은 미군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사이판 섬 북단 80m 높이의 절벽으로 몰려들었다. 어린아이를 앞세운 이들은 ‘일왕폐하 만세’를 외치며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일왕을 교주로 여기는 황국사상에 병든 자들이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처절한 패전의 역사를 간직한 이 절벽을 ‘만세 절벽(Banzai Cliff)’이라고 불렀다.
사망자 중에는 1100여 명의 한국인들도 들어있었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일본군 부대 시설 공사를 위해 강제 징용으로 끌려왔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한국인 노무자들은 일본군의 총칼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낭떠러지를 뛰어내려야만 했다.
당시 사이판서 유행했던 노래에는 “1등 국민 일본인, 2등 국민 오키나와인, 3등 국민 돼지•차모로(사이판 원주민), 4등 국민 조센진”이라는 가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일제가 겉으로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한다며 ‘내선일체’를 강조하였지만 속으로는 돼지보다 못한 민족으로 치부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2005년 6월 27일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60주년을 맞아 이러한 비참한 역사를 간직한 사이판섬을 찾았다. 사이판섬을 찾은 일왕 부부는 사전 계획된 스케줄에 의거 원주민과 미군 추도시설인 ‘마리아나 기념비’, ‘2차 세계대전 위령비’를 헌화 추도하고 ‘만세절벽’을 찾아 묵념했다.
아시아침략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의 아들이 명확한 과거사 반성의 표시도 없이 만세절벽을 찾아 ‘일왕 만세’를 외치며 집단 자살한 일본인들의 넋을 위로하겠다고 나선 모습에서 전쟁의 가해국임을 잊어가는 일본을 본다. 즉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일련의 작태와 연관지어 보면 아키히토가 만세절벽을 찾은 것은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부각시키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러나 일왕이 사이판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과거 전범들이 우글거리는 전장을 심방 할 것이 아니라 역사조작.황국사관에 물든 일본인들에 의한 침략.전쟁.대량학살주의적 광기(狂氣)요 진솔된 과거 반성인 것이다.
6월 28일에는 일왕이 지나가는 길에 슬쩍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추념 기념탑'을 방문했다. 1분 동안 헌화 없이 기념탑 앞 도로에서 묵념하고 황급히 돌아가는 깜짝 쇼를 벌렸다. 수행원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이것은 현지 한국 교민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마지못한 조치로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왕의 한국인 전몰자 추념기념탑 위령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일본 신문.TV 등 언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기자들은 "전부터 확정됐던 일정이 아니란 이유로 사진기자들이 수행버스에 못 탔고, 일부 취재기자가 버스에서 일왕의 위령 장면을 찍으려 하자 궁내청 관계자들이 촬영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궁내청은 "취재기자 중 누구는 카메라를 갖고 있어 찍고, 누구는 없어 못 찍으면 공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금지했다"는 한심한 답변을 했다.
이 말은 지금도 일본은 언론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미개한 국가이며 일왕이 4등 국민 한국인들에게 절하는 모습을 일본국민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약속의 발로인 것이다.
1970년 12월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게토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다. 이 장면은 인간이 꽃보다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으로 전 세계에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었는가.
그러나 일본 정부는 틈만 나면 "그 동안 수 차례 (과거사를) 반성해 왔는데 뭐가 문제냐"고 한국과 아시아 각국에 항변한다. 독일의 발가락도 못 따라가는 일본과 아키히토 일왕이 진정 희생자에 대한 추도의 감정이 있었다면 최소한 헌화 정도는 있어야 했다.
오늘날 일본은 힘있는 미국에 대해서는 ‘금붕어 똥’과 같이 착 달라붙은 기생정치를 일삼고 있다. 하지만 이웃나라의 어떠한 말에도 무시하고 있다. 일본은 이웃나라를 조롱하는 조작된 역사교과서를 만들기 위하여 정부와 기업을 비롯한 수백 개의 집단이 들쥐들과 같이 떼거리로 후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이웃국가들에게 문제없다고 큰소리 친다.
세계 각국은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일본만 과거 역사를 미화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수상이라는 자는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면서 각종 악행을 저질렀던 A급 전범들의 무덤인 야스쿠니신사를 호기에 찬 자세로 제집 드나들듯이 왔다 갔다 한다.
일본헌법에는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이를 어겨가면서까지 군대를 보유하고 해외 파병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참혹한 전쟁 역사를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이미 보유한 군대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헌법 개정에 서두르고, UN안전보장이사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미국 조야에 기를 쓰고 로비하고 있다.
남의 나라 땅을 자기 땅이라고 집적거리기도 한다. 히로히토나 아키히토 일왕이 공식석상에서 일왕가 혈통이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 발언은 일본인들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며 아사히신문을 제외한 어떠한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미개한 일본을 지도했던 한국인을 돼지보다 못한 4등 집단으로 업신여기고, 일왕은 한국인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되며, 한국인 위령탑에 고개 숙이는 일왕의 모습을 일본인들에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며 철저히 통제하는 일본의 작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조작 비롯된 것이다.
고대 일본은 자체적인 유구한 역사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자기네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를 조작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조작의 시작은 일본역사의 시작이라고 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묶어 부르는 ‘기기’이다.
그리고 조작된 역사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시기는 모순으로 가듯 찬 메이지 정권 때이다.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무능력을 숨기기 위하여 수많은 역사를 조작하였다.
메이지 쿠데타는 일본에 있어서 근대화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역사조작 판도라 상자에 손을 담금으로써 그들의 조상과 고향. 민족정신. 평화철학 모두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총칼로 세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참혹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조작
◆ 일본서기의 탄생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한국.중국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고대 한국인들의 일본열도 진출을 말살하기 위해 악랄하게 조작, 변조 투성이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조작된 역사(僞史)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또 "역사서가 아니라 삼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내세운 ‘정한론(征韓論)’이나 한반도에 대한 우월주의를 강조할 때에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황국사관학자.우익집단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로 굳게 믿어 그들의 바이블로 삼는 최정점에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황국사관에 물든 위정자들은 조작으로 점철된 쓰레기와 같은 일본서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하기 위하여 오히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 한국사는 변조투성이므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출발한다.
이조작된 일본서기의 탄생을 살펴보면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기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거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패망하고 만다. 이에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 일본서기에서는 귀실복신(鬼室福信)으로 표기됨)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하고 철저히 준비한다. 그러나 사이메이 일왕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신라계와 권력 투쟁으로 암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어 38대 일왕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한다. 왜국은 미쓰게노노 와카코(上毛野椎子)를 장군으로 삼아 4백 척의 군함과 2만7천 명의 대군을 금강(錦江) 하구 백촌강(白村江) 전투에 투입한다.
663년 8월 왜의 대규모 지원군은 백제의 마지막 보루인 주유성(州柔城)에서 신라에 크게 패한다. 왜의 지원군은 백제를 복국시키지도 못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일본열도로 쫓겨갔다. 이에 대하여 <구당서(舊唐書)>에는 “왜병과 백강 입구에서 맞닥뜨려 네 번을 싸워서 이겼다.
왜국의 배400척이 불타면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고, 바닷물은 붉게 물들었다. 적들은 대부분 궤멸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백제인들은 나라가 빼앗기자 지도층을 비롯한 유민들이 백제의 후국(侯國)인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백제유민들은 지금의 나라(奈良)시에 대거 정착하게 된다. ‘나라(奈良)’시의 유래는 이들이 빼앗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기분으로 살자고 하여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여 ‘나라(奈良)’라고 쓰는 것은 단지 취음(取音)하기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나라’의 유래에 대하여 들려주던 이야기를 김향수의 저서 <일본은 한국이더라>에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794년 칸무(桓武)일왕이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도읍지였다. 백제인들은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찬연히 빛나고 있는 일본 문화의 뿌리를 형성한 아스카문화(飛鳥文化-바다를 건너 새처럼 이 곳에 날아와 뿌리내린 문화라는 뜻임)를 꽃피웠다. 그리고 국가의 이름을 기존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한다.
백제인들은 일본사회에 안착하고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762년 일왕의 외척인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듯이(발해의 협공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함) 신라에 패한 마음의 앙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역사서를 통해서라도 신라에 패한 백제유민들의 한(恨)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과 백제는 우호적이지만 신라와 가야는 항상 정벌 대상이었고, 백제보다 하급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서기가 일본의 역사라기 보다는 백제의 역사 즉 ‘백제서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의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역사의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일본열도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숨기고, 백제의 역사를 일본열도의 관점에서 작성하였기 때문에 일본서기 곳곳에서 조작과 연도가 맞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왕국답게 일본서기를 복잡 괴기한 대하 픽션으로 만든 출발이다. 또 이는 일본인들이 역사조작의 바다에 빠져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오늘날까지 평화 철학이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712년 제40대 텐무(天武) 시절 백제인 히에다 노아레(稗田阿札)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현존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설화중심의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한다. 또 720년에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완성시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밝혀져 있으나 삼국사기나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반드시 나타나는 서문과 발문이 없음으로 편수년대.편찬경위와 편수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열전(志.列傳)도 없다.
일본서기에는 "텐무 일왕의 3째 왕자인 토네리신노우(舍人親王)가 칙(勅)을 받들어 일본기(日本紀)를 편수하다."로 되어 있다(일부 학자들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편찬 주장). 또 일본서기 텐무(天武) 10년(682) 조를 살펴보면 "제기(帝紀) 및 상고제사(上古諸事)를 정하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때부터 기록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편년체(編年體)로 쓰여진 ‘일본서기’에는 전을 가미한 것이 끼여 있어서 자료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41대 일왕 지토오(持統) 11년 즉 BC 660년부터 서기697년 11월까지 일본열도에 진출한 한반도인들의 왕조 형성과정, 왕권쟁탈전 등을 기록한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사기’에 비하여 많은 자료가 수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국가 사업으로 진행된 사서 편찬 소위 육국사(나머지는 속 일본기. 일본후기, 속 일본후기, 일본문덕일왕실록. 일본삼대실록)에서 보듯이 최초에는 ‘일본기’라고 하였으나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遷都)한 50대 칸무(桓武) 이후 ‘일본서기’로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명명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제기, 왕통기는 칸무(桓武737~806) 왕이 ‘삼한이 일본의 모국이요, 동족’이란 기록에 불만을 가지고 불살라(焚書) 없애버렸다고 한다.
칸무왕은 백제 왕녀의 아들이며, 수많은 백제 미녀들을 후궁으로 거느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칸무(桓武) 50대 일왕의 생모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 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녀를 말한다.
이와 같이 칸무 일왕의 한일동족설에 기인한 일본서기 분서를 일본역사상 최초로 공표한 사람은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1293~1354년)이다. 그는 14세기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적 지도자였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桓武) 일왕 때에 불태워버렸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분서사건의 근거로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 참조했다고 한다.
코우닌시키는 제52대 사가(嵯峨)일왕의 지시로 편찬된 기록으로 거기에 칸무일왕이 책을 불사르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더욱이 일본서기 원본은 1467년 5월 오우닌(應仁) 대란(大亂) 때 불타 없어졌고 일부를 모아 다시 꾸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 나라현립(奈良縣立)도서관에 1669년 작성된 필사본 15권 남아 있다. 전 30권을 갖춘 것은 없다고 한다.
일본서기가 쓰레기와 같이 조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 '고사기전'을 저술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이 지목되고 있다. 이들은 고사기,일본서기,만엽집 등 고문헌 연구에 집착한 4대 국학자들로서 일본서기를 전면 해체하여 황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징구왕후 등 일본서기를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본. 필사본. 메이지쿠데타 시절 등 어느 시점에 조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 일본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
- '일본어의 비밀'에서 밝혔듯이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生)는 그의 저서 <사람은 왜 역사를 위조하는가>에서 일본이 역사를 조작한 사실들을 파헤쳐 폭로한 중요한 자료이다. 모리 前수상이 재임 중에 주권재민(主權在民)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듯이 나가야마는 일본이 신국(神國)으로 신앙하는 뿌리는 조작한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단언했다. 나가야마는 이 책에서 일본의 역사조작 주범으로
- 일본의 정사(正史)라는 '일본서기',
- '일본은 고대부터 세계를 재패했다', '예수는 일본에서 죽었다'
-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상기(上記)',
-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칭기스칸은 일본인이었다' 등의 위서(僞書)를 꼽았다. 나가야마는 여기에서 일본서기를 최초 최고로 조작된 위서로 지목했다.
마쓰모토 기요바리(松本淸張)은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왕실의 만세일계를 확립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해서 상당 부분이 왜곡되어 있으며, 왕실이나 중앙정부에 불리한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되었는데 이로 인해 객관성이 결여된 부분이 매우 많다.”라고 말했다.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는 그의 저서 <日本神話と古代國家>에서 “일왕의 기원을 가능한 오랜 옛날로 늘려 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일왕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 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고대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던 학설)에 입각해서 제30대 스이코(推古)왕 9년(601)부터 1260년 前 BC 660년을 진무(神武)왕의 즉위 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왕의 이야기도 일왕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는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대륙인>이라는 저서에서 “인류학적 시작에서 고찰해 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족(移住族)들과 일본 원주족(原住族)의 비율은 대략 85%대 15% 정도이다. 이주족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1949년 일본은 한반도와 같은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주장했던 전 동경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동 대학의 오리엔트박물관 관장.동아시아사(東亞細亞史)학회장을 역임했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중심으로 조작된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천황족(天皇族)은 대륙 및 한반도 방면으로부터 4~5세기에 일본 열도로 정복해 들어간 기마민족이다. 특히 미마키(美麻紀) 라는 별명을 가진 10대 스진왕(崇神王)은 가야에서 건너 온 황족이 틀림없으며 미마키란 스진왕이 살았던 옛 궁성의 이름인데 미마나(任那)를 일본 발음으로 미마키(みまき)라고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일본서기의 강림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들이 일본땅 이즈모와 규슈에 내려와 원주민인 땅의 신들을 무찌르고 지배하였다’에서 하늘의 신들이란 임나(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 즉 임금의 땅에서 건너온 황족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
- 일본 고대사에 있는 쇼토쿠태자는 '헌법17조' 와 '관위(冠位)12계' 를 제정해 일본 국가의 틀을 잡았으며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해 불교 중흥에 힘썼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왔다. 그러나 오야마 세이치(大山誠一) 주부대학 교수는 "쇼토쿠(聖德)태자는 실존하지 않았다. 정치적 요청에 의해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등장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일본서기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절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코무덤(鼻塚)'이 너무나도 잔인한 명칭에 고민하다가 ‘귀무덤(耳塚)'이라 조작 시켰던 당대의 최고의 학자였던 하야시 라산(林羅山)은 '천손(天孫)들은 모두 대륙(한반도)에서 건너 온 인물이다'라고 하여 일본서기가 위서임을 밝혔다.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前구마모토 대학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는 박명미와의 공동저서 ‘아나타는 한국인’에서 “오늘날 일본어의 모어(母語)는 한국어이며,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전설은 전부 고대 한국인의 이야기다”고 말했다.
근대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일본열도는 고대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한(三韓)과, 중국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씨족적(氏族的)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도호쿠(東北)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伊豆)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土着)해 살았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豪族)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집권을 이루기 위한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라며 한일동족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는 에도(江戶)시대의 도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을 비롯해서 메이지(明治)시대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년) 등의 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 일제시대 일본 사학계의 거두 쓰다 소기치(津田佐右吉)는 '징구왕후의 삼한 정복설은 가공이며 괴이한 헛소리'라고 일축하여 일본서기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3류 사무라이들은 극심한 견제와 생명의 위협을 가했다. 결국 쓰다는 일본 우익세력에 의해 재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쓰다는 그 이후 시대와 야합하여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제국을 위해 고대역사 조작에 앞장선다. 그는 일본서기에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이 근초고왕. 신라는 내물왕이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삼국사기 및 고대 한국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조작서임으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고 주장하여 일본학계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이것이 일본학계의 정설로 되어갔다. 그는 이러한 공노로 1949년 일왕으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쓰다와 우익계의 주장대로라면 백제와 신라 초기 400년 가까운 역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편 고대 한국사가 믿을 수 없는 조작서라는 일본측 주장에 대하여 박창범 서울대 교수가 삼국사기.중국.일본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이나 월식, 오행결집 같은 현상들을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으로 검정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삼국사기가 80%, 중국이 75%, 일본서기는 45%의 정확도를 확인했다.
그 외 역사학자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 아라타 에이세이(荒田榮誠) 등 수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일본서기가 조작으로 점철된 위서임을 밝혔다.
"역사 왜곡" 과 "역사조작" 3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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