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거시적 시선으로 인간 이해하기 8/26 유럽이 앞서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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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총균쇠, 문명과 전쟁,  바른마음

거시적 시선으로 인간 이해하기



    거시적 시선  

[총균쇠,사피엔스]는 거시적 차원에서 인간과 지구를 들여다보면 현재 인류가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 어떤 끔찍한 결정들을 하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유대인 군사전문가가 쓴 [문명과 전쟁] 역시 인류의 폭력성과 전쟁이 문명 발전의 본질임을 파헤칩니다. [바른마음]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본질을 밝히는 책입니다.

거시적 시점에서 본질적인 인간을 이해하고 나면 타인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 아주 편안해 지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이니까' 하는 태도 말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까지....
총 26회로 나눠 네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전자에 없던 것이 등장했다.
복종과 질서를 이끌어 내려면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다.


총검이 효과적이라도 누군가 그걸 휘두르게 해야한다.

제 3부: 갑자기 유럽이 앞서간 이유는?

8. 그 동네는 운이 좋았지- 총균쇠



재수 없게도 가축화,작물화 할 거리가 없었다
소,양이 세렝게티 평원을 지나는데 2000년이 걸렸다.

총균쇠는 과학의 발달이 왜 유라시아에서, 다음엔 유럽에서 발전했는지를 지역과 ‘인구수’에서 찾는다.-유라시아는 가장 큰 땅덩어리이며 대륙의 축이 동서방향 이므로,-

기술이 가장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곳은 생산성이 높고, 넓고, 인구가 많은 지역, 즉 발명가도 많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도 많은 지역이다

서로 경쟁적인 사회의 수도 많고 한 지역에서 습득된 기술은 비슷한 위도의 기후를 가진 지역 사회로 비교적 빠르게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기술 가속화가 가장먼저 시작된 대륙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인구가 많으면 기술자도 많다?-

각 대륙의 면적, 인구확산의 난이도, 식량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이 같은 차이에 따라 기술발전의 차이는 더 크게 벌어졌다.

  • 기술은 자가촉매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AD 1492년에 와서는 더욱 엄청나게 앞서가고 있었다, >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고 기후와 생식지도 다양하고 인종도 다양하다, 그러나 아프리카 인들은 유럽인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침략당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식량생산의 출발시기 때문이었다,

-재수 없게도 가축화,작물화 할 거리가 없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유라시아 보다 생산이 늦어졌다, 그 까닭은 가축화 작물화 할 토종동식물이 적었고 식량생산에 알맞은 지역이 좁았으며 남북축 때문에 전파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 유라시아에서 전해진 작물을 처음 받아들인 반투족은 그 덕분에 먼저 성장하여 코이산족을 대체했다.

    2000년  

말은 BC1800 이집트에 나타났지만 사하라 넘어 서 아프리카에 기병대를 갖춘 왕국이 건설된 것은 AD1~1000년이다. 2000년 동안 체체파리가 서식하는 지역을 통과하여 남하하지 못했다.

소,양,염소는 BC3000~2000년 이미 세링게티 평원 북쪽 변두리에 도달했지만 세렝게티 평원을 지나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데는 2000년이 걸렸다.
토기도 BC8000 수단과 사하라에 나타났지만 희망봉에 도달한 것은 AD1년 경의 일이다

    중국은  

중국은 식민지도 무역도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중국의 천자는 이미 세계를 통일했으므로 개인들이 부유해지고 힘을 갖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유,불교는 상업적 성공을 중요하게여기지 않았으므로 과학의 발달을 전쟁에 도입하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차례


1부 우리는 연쇄 학살범의 후손들이다

1. 총균쇠- 가축을 키울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세균

유럽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자기 몸을 숙주로 한 세균때문,

2. [사피엔스]-IS 테러? 그건 장난이야!

과>속>종 : 거짓을 말하는 능력, 잔인한 사피엔스 종

3. 인간의 폭력성

수렵채집민을 말살해버린 농경족 -[총균쇠]. 형제 살해자, 생태계의 연쇄살인범-[사피엔스]

2부: 농업혁명과 국가의 등장

4. 사피엔스 제 2부 농업혁명/ 역사상 최대의 사기

무엇엔가 속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수가 많아졌고 차별에 순순히 복종했다.

5. 농업에 대한 테이터와 팩트

밀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6. 농업이 낳은 것은 발전이 아니었다는 논점.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 농업이 시작되었다.

7. 상상 속의 질서-국가

[문명과 전쟁]빅맨들이 무사집단을 고용해 사회를 결속한다. 수단은 폭력이다

3부 갑자기 유럽이 앞서간 이유는?

8. 그 동네는 운이 좋았지- 총균쇠

이집트의 말이 서아프키카고 가는데는 2000년이 걸렸다.-재수없게도

9. 좁은데서 볶닥이다 무역에 눈뜬 탓이다. [문명과 전쟁]

  1. 총포 VS 인구: 제해권을 통한 무역, 즉 돈이 대규모 군대를 낳는다
  2. 육군의 규모
  3. 재정 혁명- 제해권 VS 직업군인 + 상업
4부: 국가를 넘어서, 인류의 통합

10. 돈, 제국, 종교의 법칙 [사피엔스]

1572년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는 8.24일 하나님 사랑을 강조하는 개신교를 공격해서 하루만에 1만명 정도를 살해했다. 로마 교황은 매우 기뻐하며 축하 기도회를 조직하고 바티칸의 방 하나를 기념화로 장식했다.
이 폐쇄적 잔인성이 유일신교의 성공 이유다

11. 역사적 성공의 비결? 그런 것 없다.

•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5부 과학혁명과 미래

12. 무지의 혁명 과 과학진보

  1. 자본주의, 과학과 제국의 결혼-[사피엔스]
  2. 비약적 발전: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궁금한 서양의 왕립학회는 괴혈병의 원인을 알아냈고 건강한 선원들이 온세상을 정복했다.

13. 국민군-제해권투자-시장-산업혁명-돈-군대 [문명과 전쟁]

인쇄술이 상상의 초계급집단 ‘국가 프랑스’를 전파했다.
1793년 국민개병을 선언한 국가는 프랑스인을 100만명이나 징집했다.
영국의 엘리트는 기업가로 탈바꿈했고 전쟁에 투자해서 제해권을 잡자 세계 각지에서 다른 나라의 시장을 착취하여 이익을 극대화 했고 그 자금과 노예무역이 영국의 맨체스터 제조업공장에서 산업혁명을 낳았다.

14. 국가와 종교의 공존 -[총균쇠]

국가는 공인된 종교를 퍼뜨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그로 말미암아 군대는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

15. 자본이 주무르는 지구의 미래 - [사피엔스]

  1. 자본과 투자의 어둠:
    자본은, 국가와 종교를 이용하여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 동인도 회사는 세계를 정복했다.
  2. 세계 최고의 평화상은 소련에게?
  3.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과 사피엔스의 미래
    ===
[바른마음]

1 제1원칙: 바른 마음은 철저히 이기적이며 전략적이다생닭에 섹스

다른 세상에는 다른 도덕| 역겨움과 경멸감

2장 도덕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남매간의 안전한 딱 1회 섹스경험

3장 나는 바르다 윤리공부를 많이 할수록 품행이 나빠진다.

4장 도덕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과 같다

다수의 행복?,순수이성?, 자폐증 환자들의 편집증적 이론일 뿐

5장. 벤담과 공리주의| 칸트와 의무론 | 도덕성 기반 이론

바른마음의 구성요소/자유vs고귀함
2001년 마이베스의 광고 “도살당한 후 인육이 되어줄 남자 구함”

7장 정치는 도덕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8장 도덕적인 인간이 승리한다 가난한자들의 부자편들기

9장인간은 이기적 존재 VS 집단을 이루는 존재

10장 군집 스위치

‘우리’를 지키는 것이 다른 모든 도덕 기준을 앞지르게 되어 잔인한 만행도 쉽게 할 수 있다.

11장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초월적 동인이 믿음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럭비공'이 지역 럭비시합 전통의 원인으로 보는 것과 같다
날씨 천둥처럼 자연에 대한 인지모듈의 오작동이 만들어낸 예상외의 부산물이 생존에 유익했다는 의미이다.

12장 진보주의자에게 배울 점,보수주의자에게 배울 점

정치가 어차피 패거리 폭력배의 모양을 그대로 보여 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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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로 개간된 것으로 판단하건대 숲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었다. 초기 패총에서 먼 바다의 돌고래와 참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된 것에서는 알 피토니아와 엘라에오카르푸스와 같은 큰 나무를 베어 커다란 카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로헤벤이 보았던 작고 약한 배는 먼 바다까지 나가 작살로 돌고래나 참치를 잡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 필요한 목재와 밧줄을 만들기 위해서 도 많은 나무가 베어졌을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이유로 나무가 하염없 이 베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밀항자인 쥐들도 나름의 이유로 야자나무 와 다른 나무들을 '이용' 했다. 발굴된 야자나무 열매들에서 예외 없이 쥐가 갉은 듯한 잇자국이 남아 있다. 그래서 땅에 떨어져서도 발아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도래한 직후, 즉 900년경부터 삼림이 파괴되기 시작해서, 로 혜벤이 상륙한 1722년에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로헤벤이 3미터가 넘는 나무를 볼 수 없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900년과 1722년 사이에 언제 삼림이 파괴되었는지 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을까? 적어 도 다섯 가지 증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방사성 탄소법 으로 측정한 야자나무 열매들 대부분은 1,500년 이전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이후에는 야자나무가 크게 줄어들었거나 멸종했다는 뜻이 다. 이스터 섬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므로 십중팔구 가장 먼저 삼림 파 괴가 시작되었을 포이케 반도에서는 야자나무가 1400년경에 자취를 감 추었다. 개간에 따른 숯은 1440년경에 사라졌지만 그 후에도 사람이 살 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 오를리아크가 아궁이와 쓰레 기 구덩이에서 채취한 숯을 방사성 탄소법으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1640년 이후로는 연료로 나무 대신에 풀이 사용된 듯하다. 이런 현상은 최후까지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을 지배계급의 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 다. 플렌리는 화분 분석을 통해서 900년부터 1300년 사이에 야자나무. 데이지, 토로미로, 관목 등의 화분이 사라지면서 풀의 화분이 나타난다 152 문명의 붕괴

[OFF] 산데이 사용 신의 고 주장했다. 그러나 퇴적물에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적용한 결과에 따 르면 야자나무와 그 열매를 직접 측정한 결과보다 삼림 파괴가 더 나중 이다. 끝으로 크리스 스티븐슨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지대의 플랜테 이션은 1400년대 초부터 160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개발되었고, 이 시 기는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 나무와 밧줄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이런 모든 증거로 판단하건대 인간이 이 스터 섬에 정착하고 곧바로 삼림 벌채가 시작되었고, 1400년경에 최고 조에 이르렀으며,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1400년대 초부터 1600년 대 사이에 거의 끝난 듯하다. 사회에 미친 결과 이스터 섬은 삼림 파괴의 결과를 보여주는 태평양 지역에서, 아니 세 계 전체에서 가장 극단적인 예이다. 삼림 전체가 사라졌고, 모든 수종 이 멸종되었다. 그 결과는 곧바로 섬사람들에게 미쳤다. 천연자원이 턱 없이 부족했고, 살코기를 제공하던 야생 동물까지 크게 줄어들었으며, 식량 생산까지 곤두박질쳤다. 천연자원의 감소로 나무와 새에서 얻던 것, 예컨대 목재와 밧줄, 천 을 만들던 나무껍질, 깃털까지 사라지거나 크게 줄었다. 큰 나무와 밧 줄이 사라지면서 석상을 운반해서 세울 수도 없었다. 바다로 나갈 카누 조차 만들 수 없었다. 1838년 이스터 해안에 닻을 내린 프랑스 선박을 향해 작은 체구의 두 남자가 노를 젓는 카누 다섯 척이 다가왔다. 그때 프랑스 선박의 선장은 "모든 원주민이 툭하면 '미루(miru)'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들은 초조한 빛을 띠었 다. 그 말은 폴리네시아인들이 카누를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의 이름이 었다. 그들은 그 나무를 간절하게 원했다. 우리에게 그런 사정을 이해 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스터 섬에서 가 장 크고 가장 높은 산에 붙여진 '테레바카' 는 '카누를 얻는 곳' 이라는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3

뜻이다. 플랜테이션으로 개발하려고 그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기 전까 지 섬사람들은 그 산에서 카누를 만들 나무를 구했다. 그 때문에 지금 도 그 산에는 돌 천공기, 긁개, 칼, 끌 등 나무를 베고 카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장들이 흩어져 있다. 큰 나무가 부족했다는 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섭씨 10도까지 떨어지는 겨울밤에 집을 난방할 땔감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1650년 이후, 이스터 섬 사람들은 풀과 사 탕수수 등 곡물의 쓰레기를 땔감으로 사용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지 붕을 덮을 이엉과 집을 지을 나무, 연장용 나무, 천을 만들 껍질 등을 구하기 위해서 조금 남은 관목숲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심지어 장례 관습까지 바뀌었다. 시신 한 구를 태울 때마다 적잖은 나 무가 필요했던 화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시신을 바싹 말 려서 땅에 묻었다. 야생에서 얻던 식량 자원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먼 바다로 나갈 카누 가 없었던 까닭에, 이스터 섬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에게 주된 영양원이 었던 돌고래의 뼈가 1500년경부터 패총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참 치를 비롯한 난바다의 물고기 뼈도 없었다. 낚시 도구와 물고기 뼈가 쌓 인 패총의 수도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패총에서도 얕은 바다나 연안 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의 뼈가 대부분이었다. 육지새는 완전히 사라졌 고 바닷새는 연안의 작은 바위섬으로 서식처를 이동했지만 그나마 3분 의 1밖에 남지 않았다. 야자나무 열매, 말레이 애플 등 야생 열매들도 식단에서 크게 줄었다. 갑각류의 소비도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은 중까지 먹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줄 지 않는 유일한 식량 자원은 쥐였다. 야생 식량 자원만이 급격히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곡물의 생산량까 지 갖가지 이유로 떨어졌다. 삼림 파괴는 비와 바람으로 인한 토양 침 식을 부추겼다. 플렌리가 확인했듯이 토양에서 유출된 다량의 금속 이 온이 늪의 퇴적물로 스며든 것이 그 증거이다. 예컨대 포이케 반도의 발 154 문명의 붕괴

굴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곡물은 처음에 간헐적으로 서 있던 야자나 무들 사이에서 재배되었다. 커다란 야자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면서 따 가운 햇살과 증발, 바람과 빗물로부터 표토와 곡물을 지켜주었다. 하지 만 야자나무가 사라지면서 대대적인 침식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저 지대의 아후와 건물이 흙에 묻혀버리면서 포이케 지역의 밭은 1400년 경에 버려지고 말았다. 그 후 포이케에 풀이 자생적으로 돋아나면서 1500년경에 경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 세기 후에 다시 대대적 인 침식이 시작되면서 섬사람들은 그곳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삼림 파괴로 인한 피해로 곡물 생산만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흙이 건조해지고 영양분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퇴비로 사용할 만한 나뭇잎, 열매, 작은 나뭇가지를 구할 길이 없었다. 삼림 파괴를 비롯해 인간이 환경에 미친 영향으로 나타난 직접적인 결과들이었다. 그 여파는 더 참혹했다. 기아로 시작해서 싸움이 빈발했 고 급기야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 식인 풍습: 옮긴이)으로 발전했다. 살아남은 섬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기아의 참상은 '모아이 카바카 바(moai kavakava)' 라는 작은 석상의 확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야 윈 뺨과 갈비뼈를 선명히 드러낸 굶주린 사람의 모습이다. 1774년 쿡 선장은 섬사람들을 '작고 마르고 겁 많고 초라한 사람들' 이라고 묘사 했다. 거의 모두가 모여 살았던 해안 저지대의 집터들도 전성기이던 1400~1600년에 비해 1700년대에는 70퍼센트가 줄었다. 인구도 줄었다 는 증거였다. 야생 동물이 사라지자, 섬사람들은 가까이 있지만 그때까 지 식량 자원으로 생각지도 않던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인 간이었다! 인간의 유골이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후기의 쓰레기 더미에서도 발견된다. 골수를 빨아 먹으려던 것일까? 쪼개진 뼈까지 있다. 이스터 섬의 구전설화에서 카니발리즘은 빠지지 않는다. 적에게 모욕감을 주는 가장 심한 욕은 "네 엄마의 살을 내가 씹어 먹겠 다!"였다.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5

이스터 섬의 족장들과 성직자들은 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하면 서, 풍성한 수확과 번영을 약속하면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정당화시 켰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려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 우고 제식(祭式)을 집전하면서 그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했다. 먹을 것 이 넘쳐흐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이 점점 공수표가 되면서 족장들과 성직자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1680년 경에는 '마타토아(matatoa)' 라는 군부 지도자들이 족창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복잡하게 통합되었던 이스터 사회가 거듭된 내 란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전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흑요석 창('마타아' )이 얼마 전까지 이스터 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때부터 과거에는 지배계급에게만 허락되었던 해안 지역에 서민들도 작 은 집을 지었다. 안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동굴을 거처로 삼았다. 동 굴을 파서 안쪽 공간을 넓혔고, 입구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부분적 으로 폐쇄해서 좁은 통로로 만들었다. 음식의 혼적, 뼈로 만든 바느질 용 바늘, 목공 연장, 타파 천을 수선하는 도구 등이 동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판단하건대 동굴은 일시적인 은신처가 아니라 일상적인 거처였 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터 사회가 저물어가면서 낡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무너졌고, 족장의 권위와 더불어 종교적 전통까지 허물어졌다. 구전설화에 따르 면, 마지막 아후와 모아이가 세워진 것은 1620년경이었다. 가장 큰 석상 인 파로도 이때쯤 세워진 것 중 하나였다. 지배계급이 일정한 생산량을 징발해서 석상 제작에 투입된 사람들을 먹였던 고지대의 플랜테이션은 1600년부터 1680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런데도 석상이 점점 커졌다는 것에서 상대를 압도하려는 족장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의 위협을 조상의 힘으로 피해보려는 간절함이 읽혀진다.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난 1680년경, 씨족들 간의 다툼은 더 큰 석상을 세우려는 경쟁에서 상대 씨족의 석상을 무너뜨리는 파괴로 변 156 문명의 붕괴

해갔다. 그 때문에 석상들이 돌판에 쓰러지면서 파괴되었다. 제4장과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아나사지 문명과 마야 문명에서도 그랬듯이 인구, 기념물의 건축, 환경의 충격이 궁극점에 이르면서 이스터 사회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처음 상륙했을 때 붕괴가 어느 정도까지 진 행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722년 로헤벤은 이스터 섬의 한 지 역에 상륙해서 그곳만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또한 1770년 곤잘레스가 지휘한 에스파냐의 탐험대도 항해일지에만 이스터 섬에 상륙했다는 기 록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대로 읽을 만한 최초의 기록은 쿡 선장이 남 겼다. 1774년 이 섬에 상륙한 쿡 선장은 나흘을 머물면서 파견대를 보 내 내륙을 정찰했다. 그때 데려간 타히티인은 이스터 섬 사람들과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폴리네시아어가 이스터 섬 사람들의 언어와 무 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석상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쓰러 진 석상뿐만 아니라 여전히 똑바로 서 있는 석상도 목격했다는 기록이 었다. 그런데 똑바로 서 있는 석상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은 1838년에서 끝난다. 1868년의 기록에는 서 있는 석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구 전에서도 파로가 1840년경에 마지막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한 여 인이 남편을 기리면서 세웠다는 파로를 그녀 가족의 적들이 허리를 두 동강 내려고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아후도 신성함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공들여 깎은 돌판들을 빼내 아 후 근처에 마련한 밭을 보호하는 담( '마나바이' )을 쌓았고, 시신을 안치 하는 석관묘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않은 채 버려진 아후는 그저 큰 돌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대부분이 복 원되지 않았다). 조 앤 반 틸버그, 클라우디오 크리스티노, 소니아 아오 아, 배리 롤렛, 그리고 내게도 아후는 파괴된 석상에서 떨어진 돌조각 들과 뒤섞인 돌더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후를 쌓고, 석상을 조각해서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서 수세기 동안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7

을 생각할 때, 그리고 조상의 그 기념비적인 작품을 파괴한 장본인이 바로 섬사람들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글픈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모아이를 쓰러뜨렸다! 공산정권이 붕괴하자 러 시아 사람들과 루마니아 사람들이 스탈린 동상과 차우세스쿠 동상을 쓰러뜨렸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러시아인들과 루마니아인들이 그랬듯이, 섬사람들도 지도자에 대한 울분을 오랫동안 억눌렀을 것이 다. 파로의 전설이 말해주듯이, 석상의 주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석상을 하나씩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몰 락했을 때처럼 분노와 환멸이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지면서 무수한 석상들이 쓰러졌을 것이다. 내게는 또 하나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뉴기 니의 고원에 있는 보마이(Bomai)라는 마을에서 1965년에 있었던 종교 적 편견에 따른 문화적 비극이다. 보마이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가 내 게 자랑스레 해준 이야기였다. 어느 날 그는 회심자들을 불러 '이교도 의 인공물(즉 그들의 문화유산과 예술품)' 을 가설 활주로에 쌓아두고 불 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이스터 섬 의 '마타토아' 도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1680년 이후 이스터 사회를 완전히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 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환경 과 종교에 적응해나갔다. 데이비드 스티드먼, 파트리시아 바르가스, 클 라우디오 크리스티노가 아나케나에서 발굴한 가장 오래된 패총에서는 동물의 뼈 중 닭뼈가 0.1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1650년 이후에 카니발리즘뿐만 아니라 닭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여겨진 다. 마타토아는 과거에 이스터 사회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에 불과하던 마케마케(Makemake)를 창조주로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켰다. 바닷새들이 둥지를 튼 앞바다의 커다 란 세 섬이 굽어 보이는 라노카우 분화구 언저리에 있는 오롱고 마을이 158 문명의 붕괴

제식의 중심지였다. 새로운 종교하에서 새로운 예술 양식이 발달했다. 특히 암면(巖面) 조각이 성행하면서 여성의 성기, 조인(鳥人), 새 등이 오롱고의 기념물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쓰러진 마오이와 푸카오에 조 각되었다. 매년 오롱고에서 제식이 거행될 때마다 남자들은 이스터 섬 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앞바다의 작은 섬들까지 상어들과 싸우면 서 건너가, 검은제비갈매기가 그 해에 낳은 첫 알을 구해서 고스란히 이스터 섬까지 가져오는 경기를 벌였다. 그리고 승리자에게는 '올해의 조인' 이란 명예가 주어졌고 그는 다음 한 해 동안 그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오롱고에서 마지막 제식은 1867년에 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 의 눈에 띄었던 탓일까? 섬사람들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이스터 섬의 고유한 전통들은 외부 세계의 압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운명을 맞았다. 유럽인들과 해석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 사람들에게 안겨준 슬픈 이야기는 짤막하게 요약될 수 있다. 쿡 선장이 1774년 잠시 머문 후부터 유럽인들의 발길 이 끊이지 않았다. 하와이, 피지 등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 대한 기록에 서 보듯이 그들은 유럽의 질병들까지 이스터 섬에 안겨주었고, 그런 질 병들에 대해 면역성이 전혀 없던 섬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최초의 전염병은 1836년경의 천연두였다. 또한 태 평양 일대의 다른 섬들에서도 그랬듯이, 섬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하는 만행은 이스터 섬에서 1805년에 처음 자행되었고, 1862~1863년에 절 정을 이루었다. 그 해는 이스터 섬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페루인들이 20여 척의 선박을 몰고 와 1,500명(살아남은 사람의 절반)을 강제로 납치해서, 페루의 조분석(烏糞石, guano) 채취장이나 다른 노역 장에서 일할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때 납치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노역 중에 죽었다. 국제 사회의 압력 아래 페루 정부는 10여 명의 생존자를 이스터 섬으로 송환시켰지만 그들이 섬에 다시 한 번 천연두의 비극을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9

인어 / 리적인 구조였다. 섬사람들이 전해준 구전설화와 고고학적 탐사 결과에 따르면, 이스 터 섬은 11~12개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지역마다 혈통을 같이하는 씨 족이 있었다. 모든 씨족이 해안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달리 말하면 이스터 섬은 11~12조각으로 나눈 피자와도 같았다. 지역 마다 족장이 있었고, 석상을 세운 주된 의식용 돌기단이 있었다. 씨족 들은 더 많은 기단과 석상을 세우려 애쓰면서 평화적으로 경쟁했지만 결국 그런 경쟁은 전투의 형태로 발전했다. 피자 모양의 영토 분할은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설과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이스터 섬은 경쟁하던 씨족들이 종교적으로, 때로는 경

이스터 섬의 인구를 2,000명이라 고 최초로 신빙성 있게 제시한 사람들은 천연두로 대부분의 주민이 몰 살을 당한 직후인 1864년 이스터 섬에 정착한 선교사들이었다. 당시는 페루의 노예선들이 1862~1863년에 약 1,500명의 섬 주민을 납치한 후 였고, 문헌에 따르면 183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두 번에 걸친 천연두 의 창궐이 있은 후이기도 했다. 하지만 1770년 이후 유럽인들이 정기적 으로 드나들면서 기록되지 않은 다른 전염병들의 피해도 틀림없이 있 었을 것이고,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1600년대부터 인구가 급속히 줄 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 번째 천연두를 이스터 섬에 전염시킨 선박 은 마르키즈 제도까지 항해했고, 그 결과로 섬 주민의 8분의 7이 떼죽 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두 번의 천연두, 납치, 다 른 전염병, 17세기의 인구 붕괴를 겪은 후에 다시 1864년에 천연두로 많은 사람이 죽고도 2,000명이란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전성기의 인구 -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29

더우 깊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종족들조차 내륙보다 바다를 통해 서 로 교역하거나 침략했다. 기단과 석상 이스터 섬을 언급할 때마다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제를 이제 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즉 '모아이(moai)' 라 불리는 거석상과 '아 후(ahu)' 라 불리는 돌기단이다. 지금까지 약 300개의 아후가 확인되었 지만, 대다수의 기단은 작고 모아이가 세워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약 113개의 기단에는 모아이가 우뚝 서 있고, 그중 25개는 상당히 크고 정 성들여 만든 흔적이 뚜렷하다. 섬의 각 지역마다 1~5개의 커다란 아후 가 있었다. 석상이 세워진 아후는 대부분 해안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아후와 석상은 내륙을 향하고 있다. 특히 석상의 얼굴은 바다를 향하고 있지 않다. 아후는 직사각형의 기단으로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회 색 현무암으로 사방에 옹벽을 쌓고 그 안을 돌조각으로 채운 것이다. 일부 벽, 특히 아후비나푸 지역에서 발견된 벽은 아름답게 깎은 돌들로 세워져 잉카의 건축물을 떠올려준다. 이 때문에 토르 헤이에르달이 이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