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새해가 밝았다. 익어갈수록 황금 빛이 나야하는데 아직도 내 고개는 뻣뻣하다. 황금빛 찬란함을 어떻게 뽐내야 하는지 모르고 언제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모르니 아직도 나는 불안한 자식이다.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맛 보았던 실패를 아들은 느끼지 못하게 하게하려고 사랑과 지혜를 다 쏟아 내셨다. 어머니는 그게 ‘복’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은 맞다. 감사하다. 근데 정말 복에 겨워서, 사치스럽게 까지 느껴지는 그 말을 불안함과 부채감을 담아 뱉어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 내 책임을 내가 온전히 지고 있지 못해서 나온 말이다.
화목한 가정, 사랑이 담긴 지원 아, 물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교 신입생때 부터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게끔 교육 해오셨다. 지금은 물론 학자금 빚을 전부 갚았고 모든 경제 활동에 소비 되는 돈은 내가 번 돈이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내 최후의 보험이다. 밑에서 날 지켜봐주신다. 추락했을 때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트램펄린 처럼 내가 불안하지 않게 늘 힘이 되어 주신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잘 안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보험도 없으셨다. 떨어지면 떨어지는대로 상처를 치료하시기도 전에 일어나서 다시 절벽을 오르셨다. 야생에 떨어진 베어그릴스 같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살아오셨다. 부모님이 가진 상처들을 다 아물어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 같이 아버지는 나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뒤에 십자가를 진 채로 나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사함과 동시에 부채감이 밀려왔다. 부모님이 걸어온 그 발자취를 나는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안일함이란 작은 돌에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익어가지만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 벼처럼 불안하다. 사실 나는 쭉정이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 생각 자체로도 힘이 빠져 나는 아직 알맹이를 꺼낼 준비가 안된 벼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제 나에게 ‘복’은 황금 빛을 비추는 고개를 숙이는 지혜일 것이다. 저 밑에 트램펄린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그걸 등에 지고 더 힘차게 절벽을 오를 힘이 필요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모든 말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미 복 받은 사람이지만 이제는 받은 복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내년 첫 날에는 내가 받은 복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좋겠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