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연필 (I, Pencil)

in #i7 years ago (edited)

(레오나드 리드에게 들려준 나의 가계보(家系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납 연필(lead pencil)이야. 나무로 된 보통 연필로서, 읽고 쓸 줄 아는 모든 어린이와 어른에게 친숙한 물건이지. 쓰는 일이 내 직업이자 취미야. 그게 내가 하는 모든 일이지.

내가 왜 내 출생연원을 밝히려고 하는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지 몰라. 글쎄. 우선 내 얘기는 재미있어. 그 다음엔 말이지, 나는 미스터리(mystery)야—석양이나 심지어 번갯불보다도 더 큰 미스터리지. 그런데 슬프게도, 사용자들은 나를 별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어도 그만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는 알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야. 이런 깔보는 태도가 나를 흔한 물건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말았어. 이런 통탄스런 오해와 곡해(error)에 갇혀 있는 한, 인류는 머지않아 위기에 빠지게 되고 말거야. 왜냐고? 현자인 G. K. Chesterton이 관찰했듯이, “우리 인간들은 지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멋진 물건들(wonders)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경이로음(wonder)을 잃어버려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거든.”

나, 연필은 비록 단순해 보이지만, 너의 경이와 경외(wonder and awe)의 대상이 되고도 남아. 이것이 내가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거야. 사실 네가 나를 이해하게 되면—아니,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너무 어려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해 달라고 말할 수 없지만—만일 나, 연필이 상징하는 기적(miraculousness)을 네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넌, 슬프게도, 지금 인류가 상실해 가고 있는 자유를 구원해내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거야. 난 네게 가르쳐 줄 심오한 교훈(profound lesson)을 갖고 있어. 그리고 나는 이 교훈을 자동차, 비행기, 접시세척기 등 그 어떤 물건보다 잘 가르쳐 줄 수가 있지. 왜냐고? 글쎄, 나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단순해 보이는 물건이니까.

단순하다고? [천만에 말씀.]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해.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지 않아? 더구나 미국에서만 연필이 연간 15억개나 생산되고 있는 판국에 연필 생산과정의 전모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보면 말이야,

나를 집어 들고서 쭉 훑어봐. 뭐가 보이지? 목재, 라커 칠, 인쇄된 라벨(labelling), 흑연 납, 지우개와 철금속 깎지, 그런 것들 말고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지?

무수하게 많은 조상들

네가 네 족보를 멀리 추적해낼 수 없듯이, 나도 나보다 앞서 존재했던 것들 모두에 이름을 붙이고 설명하기는 불가능해. 그러니 내 출신배경이 얼마나 풍부하고 복잡한지를 네게 인상지우기에 족할 정도로만 내 선조들에 관해 얘기해 볼까 해.

내 족보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오레곤 주에서 자라는, 나무결이 곧은 삼목(cedar) 나무야. 이 삼목을 켜는 톱이며, 목재를 거두어서 기차역까지 운반하는 데 사용된 트럭, 밧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어들을 생각해 봐. 또 톱, 도끼, 트럭, 모터, 기어들과 밧줄을 생산해 내기 위해 광물을 캐고 철을 만들고 제련하는 일, 밧줄의 원료인 삼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모든 단계와 과정, 그리고 침대와 작업실이 딸린 벌목 캠프를 짓고, 캠프에서 사용할 음식 식기를 만들고, 각종 식물을 재배하는 일에 참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재주(skills)를 생각해 봐. 벌목꾼들이 마시는 커피 한잔의 생산과 유통 단계에 참여했을 수천명의 사람들은 또 어떻고...

이제 목재는 캘리포니아의 싼레안드로로 운반되지. 목재를 싣는 무개차 차량, 철도, 기차를 만든 사람들을 상상인들 할 수 있겠어? 열차에 장착된 통신장비를 건설하고 설치한 사람들은 또 어떻고. 이 군단(legion)의 사람들이 다 내 선조야.

싼레안드로에서의 목공작업을 생각해 봐. 삼목 목재는 작은, 그리고 두께가 1/4인치가 좀 안 되는 연필 길이의 판목으로 잘라지지. 이것들은 가마에서 건조되고 칠해져. 여자들이 얼굴에 연지를 칠하듯이. 사람들은 내가 윤기 없는 하얀색이기보다는 예뻐 보이기를 원하니까. 판목은 왁스칠이 된 다음, 가마에서 다시 건조돼. 물감과 가마를 만드는 일에, 그리고 열과 전기, 벨트, 전기모터, 그 밖에 목재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공급하는 일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재주가 동원되었겠어? 목재소 청소부들도 내 조상이냐고? 물론이지. 그 뿐 아니야. 목재소에 전기를 대주는 태평양가스전기회사 수력발전소 댐을 건설할 때 콘크리트를 부어넣은 사람들도 내 조상 가운데 있어.

60개 차량분의 판목을 싣고 대륙을 횡단해 수송하는 일에 한 몫 거든 이곳저곳의 무수한 조상들도 빼먹으면 안 되지.

드디어 내가 연필공장에 도착했어. 4백만 달러나 되는 기계설비와 빌딩으로 이루어진 공장이지. 이 자본들은 검소한 내 부모[즉, 연필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한 많은 사람들]의 저축이 축적된 결과지. 이 공장에서 판목 하나하나가 복잡한 기계를 거치면서 8개의 홈이 파진 판목으로 바뀌어. 그 다음에는 다른 기계가 하나 건너 하나 마다의 판목에 납 연필심을 내려놓고, 접착제를 발라서 다른 판목위에 겹쳐 놓지. 말하자면 납 연필심 샌드위치라고나 할까. 이 나무로 밀착된 샌드위치에서 나와 일곱 형제가 조각되어 나와.

나는 납 연필이라고 불리고 있잖아? 그런데 이 납 연필심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오기는 마찬가지야. 사실 그 속에는 납이 없지만 말이야. 흑연은 실론(스리랑카)에서 채광돼. 이곳에서 일하는 광부, 이 광부들이 사용하는 각종 도구, 흑연을 담아 운반하는 종이 포대, 그리고 이 포대들을 묶는 줄을 만든 사람들, 포대를 배까지 운반해 선적하는 사람들, 선박을 건조한 사람들을 생각해 봐. 항로상의 등대지기, 그리고 항구의 행해관제사도 다 나의 출생을 도왔지.

흑연은 미시시피에서 퍼온 진흙과 혼합되었고, 이 과정에서는 수산화암모늄이 사용되었어. 설폰산화된 동물성수지 용제가 첨가되었지. 여러 기계를 거쳐 나온 이 혼합물은 최종적으로 쏘시지 분쇄기에서 나온 사출물 같은 형태였는데, 사이즈에 맞게 잘라지고 건조된 다음, 화씨 1,850도에서 여러 시간을 구워냈지. 강도와 부드러움을 더하기 위해 납은 다시 뜨거운 혼합물로 처리되었고, 이 혼합물에는 멕시코에서 온 칸델리일라 왁스, 파라핀 왁스, 경화된 자연지유가 섞이게 되지.

내 삼목에는 여섯 차례나 래커 칠을 했지. 래커의 성분을 알기나 해? 아주까리 열매 재배자나 아주까지 기름의 정제자가 연필 생산에 연관된 줄을 누가 알기나 하겠어? 그런데 그게 사실이거든. 참 기가 막히지? 래커가 아름다운 노란색 물질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는 또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걸.

라벨을 찍어내는 일을 좀 봐. 얇은 필름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잉크원료인 카본블랙에 수지를 섞어 만드는 거야. 수지를 어떻게 만드는지, 네가 알기나 해? 카본블랙은 또 뭔지 아느냐고?

내게 달린 작은 금속, 즉 쇠테는 놋쇠야. 아연과 구리를 채광한 사람, 이것을 빛이 나는 얇은 박판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떠올려 봐. 내 쇠테에 있는 검정 반지 같은 것은 검정 니켈이야. 검정 니켈은 뭐고 또 어떻게 입혀졌을까? 내 쇠테의 중앙에 검은 니켈이 입혀지지 않게 된 얘기를 다 설명하자면 몇 페이지도 모자라.

이제 나의 최상의 영광에 관해 얘기할 차레인데, 이 업계에서는 이것을“마개”라는 우아하지 않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이 부분은 사람들이 나를 갖고 글씨를 쓰다가 실수하면 그걸 지우는 데 사용하지. “훽티스”라고 불리는 성분이 지우는 일을 해. 그것은 고무 비슷한 데, 인도네시아에서 온 평지의 씨 기름(rapeseed oil)에 염화황을 반응시켜 만든 거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무는 죄어 묶는(binding) 목적으로만 사용돼. 그 밖에도 고온에서 가황처리를 하고 속성시키는 물질들이 있지. 경석(속돌)은 이태리에서 오고, “마개”에 색을 내주는 색소는 카드뮴 황화물이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

앞에서 나는 지구상의 단 한 사람도 나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에 도전할 사람이 있어?

실제로 수백만 명의 인간이 나의 제조과정에 한몫 씩 했지. 하지만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중 몇 사람을 아는 게 고작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오지 브라질에서 커피열매를 따는 사람, 그리고 다른 곳의 식물 재배자들을 내 창조에 연결시키는 것은 내가 나가도 너무 나간 거라고 말할지도 몰라.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말이야. [허나] 나는 이 주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어.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 [나를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단연코 단 한 사람도 없어. 여기에는 연필회사의 사장도 포함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야 많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장님도 극소량의 노하우(know-how)를 보탰을 뿐이거든. 노하우의 관점에서 볼 때 스리랑카의 흑연광산의 광부와 오레곤 주의 벌목꾼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노하우의 유형(type)의 차이일 뿐이야. 연필공장의 화학전문가나 유전(油田)의 노동자—파라핀은 석유의 부산물이니까—가 [연필 생산과정에] 불가결하듯이, 그 광부도, 벌목꾼도, 불가결한 존재들이라고.

놀랍기 짝이 없는 사실이 바로 이거야. 유전의 노동자도, 화학전문가도, 흑연이나 진흙 채광인부도, 배의 선원, 선박건조자, 철도와 도로 운송자, 나의 작은 철금속 표면을 우툴두툴하게 만드는 기계 운전자, 연필회사 사장이 각자의 일(singular task)을 수행한 것은 나를 원해서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야. 이 사람들은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나를 원한 것만큼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 수백만 명의 사람 가운데는 평생에 연필을 본 적도 없고, 그것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 그들의 동기(motivation)는 내가 아니고 다른 것이었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거야: 이 수백만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노하우를 자기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물건과 서비스로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자기가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과 서비스를 사려고 경제활동에 참여한 것이라는 뜻임] 나는 이들이 원하는 품목 중 하나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어떤 총감독(Master Mind)도 없이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총지휘자[총감독] 없이 진행되었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누구도 내가 태어나게끔 만든 이 무수한 행위들(countless actions)을 전반적으로 지휘하거나 강제로 명령한 사람이 없었다고. 총감독의 흔적조차도 볼 수가 없지. 대신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작동을 보고 있는 거야. 이것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그 미스터리지.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무를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이 있어. 우리는 왜 이 말에 동의하는 걸까? 우리는 나무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겠어? 사실 우리는 묘사조차 제대로 못하잖아? 기껏해야 피상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예컨대 분자의 어떤 구성(molecular configuration)이 나무의 모습을 띠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 어떤 뛰어난 지성(mind)이 있어서 나무가 일생 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모습을 바꿔가도록 만드는 분자의 항상적인 변화들을 감히 기록—지휘하는 일은 차치하고서라도—해 낼 수 있겠느냐고? 이런 거창한 일(feat)의 성취란 아예 생각조차 못할 일 아니가!

나, 연필은 말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의 복합물(complex combination of miracles)이야: 나무, 아연, 구리, 흑연, 등등[이 내포하고 있는 각각의 기적들]. 이런 자연(Nature) 속의 기적들에 더 어마어마한 기적이 보태져야만 해. 그것은 창조적인 인간 에너지의 엮여짐(configuration of creative human energies), 즉 수백만 개의 아주 작은 노하우가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대응하여 또 어떤 인간에 의한 총지휘(human masterminding)가 없는 가운데 자연적으로, 자생적으로 엮여지는 그 기적 말이야!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무를 창조할 수 있으므로,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내 주장이야. 분자를 결합해서 나무를 창조해 낼 수 없듯이 어떤 인간도 이 수백만 개의 노하우를 지휘해서 내가 태어나도록 만들 능력이 없거든.

앞에서 내가 “만일 나, 연필이 상징하는 기적(miraculousness)을 네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넌, 슬프게도, 지금 인류가 상실해 가고 있는 자유를 구원해내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었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아? 내 말은 이런 뜻이었어.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노하우들이 자연적으로, 그렇지, 자동적으로 저절로 얽히고설키어서 인간의 필요와 수요에 부응하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패턴들(creative and productive patterns)을 구성해낸다는 사실을 안다면—다시 말해서 정부나 다른 어떤 강제적인 총지휘자가 부재한 속에서 말이지—그 때 그 사람은 자유의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요소(absolutely essential ingredient for freedom), 즉 자유인에 대한 믿음(faith in free people)의 소유자가 될 거라는 거지. 이 믿음 없이 자유는 불가능해. [이 믿음이 없이는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뜻임]

예를 들어서 만일 정부가 창조적 활동, 예컨대 우편배달에 대한 독점권을 갖게 되었다고 해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제 할일이나 하는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에 맡겨서는 우편물이 효율적으로 배달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지. 이유가 뭐냐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 스스로는 우편배달에 요구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해낼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다른 어떤 누구도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 이런 가정들은 다 맞아. 어떤 개인도 연필의 생산에 필요한 충분한 노하우를 갖고 있지 못하듯이, 어떤 사람도 한 국가의 우편배달 사무 수행에 필요한 충분한 노하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거든. 자유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속에서—다시 말해 수백만 개의 작은 노하우들이 자연적으로 또 기적적으로 형성되고 협력하여 이 필요를 충족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속에서—사람들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 우편은 정부라는 “총지휘자”가 없이는 배달될 수 없다는 [틀린] 결론 말이야.

넘쳐나는 증언들(Testmony Galore).

만일 나, 연필이, 인간이 자유롭게 시도해서 이룩해 낼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라면, 자유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결론이 어느 정도 타당한지 몰라. 그런데 말이야. 나 말고도 그런 증언을 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넘쳐난단 말이야. 이 증언들은 하나같이 우리 그리고 우리 각자에 관한 증언이야. 예컨대 자동차, 계산기, 탈곡기, 공작기계, 기타 수만 가지 물건의 제작과 비교하면 우편배달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일이야. 배달이라? 배달에 관해 조금만 말해볼까? 만일 각자가 시도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람들은 단 일초 미만에 전 세계로 사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지; 이벤트가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시각적으로 또 동영상으로 각 가정에 보낼 수 있어. 사람들은 150명의 승객을 시애틀에서 볼티모어까지 4시간 안에 실어 나르기도 하잖아. 텍사스로부터 뉴욕에 있는 가정의 레인지나 벽난로에 가스를 공급하는 데 믿기 힘들 정도로 싼 가격에, 아무런 보조금을 받지 않고 하고 있지 않아?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미국 동부해안까지 배달되는 무게 4파운드[1.8Kg, 즉 펫트병 1개 정도]의 석유 운반비는 말이지, 정부가 무게 1온스[28.3g] 짜리 편지를 길 건너 집으로 배달하는 우편요금보다도 적다, 이 말이야!
내가 가르쳐 주어야만 할 교훈은 이거야: 모든 창조적 에너지를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라. 이 교훈에 어울리게만 사회를 조직하라. 사회의 법적 장치(legal apparatus)가 모든 장애물을 최대한 제거하게 하라. 창조적 노하우들(creative know-hows)이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허용하라. 자유인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응하리라는 믿음을 가지라, 이 말씀이야. 이 믿음은 기필코 확증되고야 말거야. 나, 연필은, 보기에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마치 태양, 비, 백양목, 대지가 실제적인 것만큼이나 이 믿음 [즉 자유롭게 놓아두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응해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실제적인 믿음(practical faith)임을 증언하기 위해 나의 창조의 기적(miracle of my creation)을 말해본거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만은 “나, 연필”에 대하여 격찬하고 있다. “나, 연필,” 1976년판에 덧붙인 그의 후기를 인용한다.:

“레오나드 리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나, 연필”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간명하게, 설득력 있게, 효과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강제력의 개입 없이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분산된 지식과 정보의 전달수단—이것이 개개인으로 하여금 누가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각자 바람직한 일을 하도록 만든다—으로서의 가격시스템의 역할의 의미를 잘 묘사해 준 문헌은 아직껏 본 바가 없다.

우리는 레오나드의 이야기를 TV쇼인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의 첫 부분, 그리고 동명의 책의 제1장에서 다루고 있는 “시장의 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우리는 이야기를 요약하고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연필을 만드는 과정에 관여된 수천명의 사람 중 누구 한사람도 연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자의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평생 연필을 본 적도 없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각자는 그저 자기의 일을 자기가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을 뿐이다. 우리가 문방구에 가서 연필을 살 때, 우리는, 말하자면, 우리 각자의 서비스를 [결과적으로] 연필 생산에 관여한 수천명이나 되는 사람들 각자의 서비스와 교환하는 셈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연필이 생산될 수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아무도 중앙통제실에 앉아서 이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군대나 경찰도 [이 내린 바 없는 명령을] 강제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 살고 있고, 다른 언어를 쓰며, 종교행태가 다르고,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이런 차이점의 어떤 것도 이들이 연필의 생산과정에서 서로 협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200년전에 우리에게 답을 주었다.”

“나, 연필”은 레오나드 리드의 전형적인 창작물이다: 상상력으로 가득차고, 단순하지만 미묘하며, 레오나드의 저작이나 그가 했던 모든 것에 깃들여 있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고취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 늘 그랬듯이,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느니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것이 그의 기본적인 신조였다. 그가 평생 일반대중을 위해 봉사하면서 간직했던 신조였다. 어떤 압력이 와도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사유재산권, 자유경쟁, 그리고 엄격히 제한된 정부(severly limited government)를 필요로 한다는 그의 기본사상을, 그의 말이 수용되기 어려웠던 시기에도 살아남게 하고, 오늘날에 와서 그토록 효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펼칠 수 있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유주의자요 시장주의자이자 말솜씨 좋기로 유명한 밀턴 프리드만의 절찬이 잘 말해 주듯이, 시장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토록 쉽고 재미있게 잘 묘파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은 무엇을 깨닫고,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이 글을 읽고 나서 세상을 보는 당신의 눈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 글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지휘에 따라 돌아가는 기기묘묘한 세상의 이치에 번쩍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당신은 꽤 둔감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도 총감독자 없이도 기가 막히게 자동조절 기능을 내장하고 있는 시장(self-regulating market)보다 더 나은 상태로 시장을 이끌고 관리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고집불통이다.
“보이는 손”(즉 사람이나 정부)은 “보이지 않는 손”의 솜씨를 당해낼 수 없다.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시장 메커니즘을 “보이지 않는 손”에 비유한 이유이다. 비록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은 사실상 창조자, 조물주, 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창조자, 조물주, 신이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시장 메커니즘을 인간이 흉내낼 수 없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기도 하다. 아담 스미스의 다른 저작, 「도덕감성론」에는 창조자, 조물주, 신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을 배우고 있지만, 어떤 경제학 교과서도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아담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담 스미스가 발견하고 묘파한 시장의 근본적인 작동원리와 메커니즘을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있다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은 다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의 말도 빤한 말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담 스미스를 경제학자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당시에 사회철학자(moral philosopher)로 불리었다. 그의 「도덕감성론」을 읽은 독자는 그가 심리학의 아버지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생각할 것이다. 또 그의 Jurisprudence를 읽은 독자는 그가 법률학자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그의 국부론도 단순한 경제학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덕, 윤리 등에 대한 그의 사상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이유야 어쨌든 경제학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하여 잘 가르치고 있다면, 또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에 입각해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나, 연필”과 같은 글이 나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 이후 경제학 교과서에서 시장이 사라졌다.”는 로날드 코우즈(Ronald Coase)의 지적은 옳을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가 시장의 작동원리이고 메커니즘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교과서에서 시장 그 자체에 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장실패이론이다. 시장이 무엇인지? 어떻게 기능하기에 그리도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내는지? 에 대한 설명은 아예 제켜버리고 시장의 불완전성을 부각시키기 바쁜 셈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경제학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주로 담겨 있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시장실패의 교정을 목적으로 삼는 정부개입의 필요성과 방법론에 관한 얘기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시장을 깊이 있게 이해시키고 이에 기초해 시장경제를 주창하면서 정부의 역할의 적정선을 설정해 주어야 할 경제학이 정부역할의 확대와 정부규모와 영향력의 팽창만을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있다면 이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의 교훈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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