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3권(114)
제4장 대구방어전
제1절 정부 및 육군 본부의 부산 이동
8월 21일 30만의 인구로부터 70여만의 인구로 급증된 대구시는 물정소연(物情騷然)한 정세 하에서 각지로부터 운집한 피난민과 원주민은 대피의 준비에 분망(奔忙)하였다. 이날 대구는 20㎞ 내지 25㎞의 교외에 적의 삼면 포위 상태 하에 놓여 바야흐로 누란의 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심각한 탁기(濁氣) 가운데 심야 돌연 투하된 3발의 적 포탄은 대구시의 암막을 깨뜨리고 시민으로 하여금 극도로 신경을 긴장하게 하였으며 또다시 23일 심야에는 5발의 적탄이 투하되자 시민은 공포와 전율로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대구시가 적의 포사격권 내에서 이탈을 면치 못한 비운에 처하자, 작전상 특히 긴밀을 요하던 정부의 국방, 내무, 사회의 삼부와 각부의 연락사무소는 부득이한 철수를 감행, 부산으로 향하였고 그 외 지방, 행정기관도 소개의 준비를 완료하였다.
사태가 여전히 험악하게 되지 유야무야(有耶無耶)한 소개 명령은 일연의 풍설로서 순식간에 시민에게 전파되어 이른 아침부터 선을 다투는 시민은 범람하는 홍수와 같이 부산 가도를 따라 수성교 방면으로 살도되어 관헌의 제재도 불원하였다. 이때 당국은 진퇴의 기로에 서서 사태 수습에 대한 현책을 강구하지 못하던 바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은 돌연 단호한 엄명으로써 소개를 중지시켜 시민으로 하여금 일말(一沫)의 불안을 포회(抱懷)하게 하였다.
9월 6일 적이 결말적인 정세하에서 최후적으로 경주~영천~신령~다부동~왜관 방면에 약 9만의 대병력과 전차(제17사단) 52대 각종 포 110문으로 증강시켜 최대의 규모로서 소위 제2차 일대 총공격을 취하여 왔으므로 육군본부는 육본 작명 제168호(부록 제82 참조)에 의거 부산으로 이동, 부산지구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울산, 밀양에 이르는 예비선을 획정하는 동시,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여 교두보의 설치, 구포의 인도교 폭파 또는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최대의 저항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제2절 일반 정황
제1항 양군의 정황
(一) 적의 정황
8월 4일 대구공략을 위한 제1차 총공격 이래 8월 14일 현재 왜관 방면에서 미 제1기갑사단을 위협하는 적 제3사단 및 선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도하한 적 제15사단 및 상주 방면에서 남하한 적 제13사단은 좌측 적 제3사단과 동일선상에 진출, 제15사단은 수암산~유학산 일대에서 제3사단 일부 병력과 더불어 아 제1사단의 좌측에 대치하였고, 제13사단은 유학산으로부터 천평 일대에 이르러 적 제1사단과 연계되어 아 제1사단의 우측 정면에 배치되어 있어 대구 공략의 최단 거리에서 포위망을 압축하고자 하였으나, 동부전선의 공세가 지연됨에 따라 8월 20일경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증강시키고 각각 8월 29일에 이르기까지 교전은 8월 25일의 우측 가산에 소수의 적이 침입하였을 뿐 진퇴를 반복 중이었고 중부 및 동부의 적은 8월 29일 현재 제1사단은 대율동~신원 간의 각 북방 4~5㎞ 지점을 연하는 선에서 아 제6사단 제7연대 및 기갑연대 제5연대와 대치하였고 제8사단 및 제103연대는 신령동 북방 약 4㎞ 지점으로부터 동부 조림산까지의 선에서 아 제6사단의 제2, 제19연대와 대치하였다.
소위 적의 제1차 총공격으로써 8월 15일 이전에 일거 대구까지 진출하였던 적의 기도가 완전히 좌절됨과 막대한 병력 및 장비의 피해를 입고 적은 현지 및 후방으로부터 일익 충실화 하였으나, 증강되는 아군의 반격에 봉착하여 진출이 지둔(遲鈍)하여짐에 따라 장대한 보급로가 아공군의 계속되는 강타에 의하여 마비상태에 놓여 보급 수송이 두절되는 등등 상황이 전반적으로 불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초조한 적은 아군의 반격태세가 완비되기 전에 제2차 총공격으로써 협소한 지역으로 아군을 압축하여 최종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왜관, 다부동, 신령, 영천선 방면으로부터 일거에 결전을 하여 돌파구를 확대하고, 단기에 아군 주력을 섬멸하는 동시에 부산의 점령을 기도로 8월 말까지 비교적 교착 상태에 놓여 있던 전선은 공격태세로 들어가고 9월 3일을 전후하여 돌연의 대공격을 취하여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