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12일 수요일] 오늘의 일기
그간 좀 바빴다.
본부장님은 스위스로 2달 장기 출장을 가시고, 팀장님은 스페인으로 10일 휴가를 가는 바람에
졸지에 지난 금요일부터 부서 모든 업무가 나한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주말에는 딸이 장염에 걸려서 병원도 왔다갔다하고 집에서 애 케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월요일에도 9시까지 야근하면서 기획서랑 라이선스 지원서 70장짜리 작성했었고
어제 화요일까지 그 두개 업무는 최종안 작업해서 다 넘겼다.
그리고 이제 다시 수요일.
약간은 다시 여유를 찾은 봄 같은 오전이다.
어제 퇴근 전에 어쩌다보니 팀원 한 분이랑 삶의 방향성에 대해 얘기를 좀 오래 하게 됐는데,
첫 시작은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에 대해 얘기하다가 대화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 내가 해줬던 얘기는, 나도 솔직히 이 일이 재미있나 없나만 놓고 보자면 재미없다에 좀 더 가깝다 였다.
그런데 의미가 있냐 없냐는 조금 다른 얘기라고 하면서
나한테 재미있으면 의미 있는 일이고, 재미없으면 의미 없는 일이라고 구분 짓는 건 좀 경계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도 그러한 것이, 그렇게 어떤 일의 의미를 구분 지으려는 거야말로 전형적인 목적주의적 프레임에 갇힌 사고기 때문이다.
삶에는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삶은 반드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 방향성을 찾아내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야 한다.
산업시대 역군들에게는 들으면 가슴 뜨거워질 훌륭한 문장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우울증 유발 트리거일 뿐, 전혀 와닿지 않는 문장이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 삶이라는 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냥 태어난 거고, 그냥 살아가는 거고, 죽을 때도 그냥 죽는 거다.
거기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가 목적주의 프레임에 씌인 산업역군 망령들의 농간이다.
.
.
.
.
.
.
어제 자려고 누웠다가 이 주제에 대해 혼자 조금 더 깊게 생각을 해봤는데
그...... 옛날에 정해진 스토리대로 알아서 진행되면서 나는 전투와 레벨업에만 집중하면 되던 게임들이 목적주의에 걸맞는 게임 형식이라면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같은 오픈월드 게임들이 바로 내가 말하는 목적주의에서 탈피한 요즘 시대에 맞는 인생관인 것 같다.
물론 야숨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메인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고, 결국 가논을 쓰러뜨리고 젤다를 구한다는 "목표"가 있긴 하다.
그런데 그 목표가 곧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목표란 달성하면 내 삶에 도움이 되고 유익한 것들이고, 달성하지 못 하면 삶이 조금 불편해지는 정도의 거라면
목적이란 내가 반드시 추구해야 하고,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 모든 인생을 바쳐야하는 그런 거라고 정의해보자.
내 얘기는 그런 목적 따위가 우리 인생에 애초에 없다는 거다.
적당히 그때 그때 뭔가 단기적으로 해내야 할 목표 정도는 가져볼 수 있겠으나, 그걸 목적으로 연결 짓는 작업은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꼭 가논을 안 잡더라도 그냥 그때 그때 눈 앞에 주어진 상황에 몰입해서 화살을 피하거나 버섯을 줍거나 광물을 캐거나 요리를 하거나
경치를 감상하거나 하늘을 날거나 NPC와 대화를 하거나 상인과 거래를 하거나 누워 자거나 좌우지간에 그냥 그 상황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어차피 이 복잡한 세상, 당장 내일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뭔 그리 큰 목적을 가지고, 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또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질주해야 할까.
.
.
.
.
.
.
요즘 진짜 많은 걸 내려놓았다.
안정적인 환경에 놓여있다보니 잠시 야생 본능을 잊고 살고 있었는데
내가 뭐 언제부터 대단하게 훌륭한 환경에서 커왔다고, 벌써부터 미래를 걱정하고 십년 이십년 뒤를 고민하고 있냐.
그냥 당장 내일이라도 까딱하면 죽을수도 있다는 야생의 법칙에 따라
그저 주어진 오늘 하루에 충실하자.
언제나 오늘 하루가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인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