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5일 수요일] 오늘의 일기

in #diarylast month (edited)

대학원 시절,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의미 없는 논문을 타이핑하며 인생무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며

육체와 정신을 모두 지배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딱 결심했던 것이, 일단 이 논문 작업만 다 마치게 되면 다시는 책상 앞에 앉아서 의미 없이 타자 만치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 뒤로 바로 KOICA로 인도네시아에 가게 됐고, 2년 반 뒤 한국에 돌아와서부터는 전공을 내려놓고 칵테일 조주사로 6년을 내리 살았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분야를 바꾸어 지금은 핀테크 회사에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매일 타이핑하는 평범한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논문을 쓰던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조금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요즘 문득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변한 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일하게 삶이 보람 있었던 순간은 대학원 졸업 이후부터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대충 한 8~9년 정도의 시기였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란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의미 없이 키보드를 난타했던 시간으로 점철돼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메이커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뭔가 작은 거라도 좋으니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

거기서 오는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중추적인 뿌듯함이라는 게 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매 순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 더 나아진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 하면 인간은 언젠가 무너지게 돼있다.

내 최근의 우울감도 아마 삶이 정체돼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주요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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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아주 작은 이벤트 하나만 추가돼도 요즘은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보통 퇴근하면 2호선 역삼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가끔 강남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탄다든지 하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조금은 더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택배를 시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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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경기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은 2부 리그 축구 시합이라고 생각한다.

무수한 가능성이 존재했던 전반전과는 달리 이제 경기 스코어도 꽤 차이가 나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승패가 어느 정도 다 정해져서

이걸 끝까지 보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시시한 축구 경기.

누군가는 막판 역전극을 기대하며 끝까지 관전하겠지만

사실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십중팔구 경기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이벤트는 없을 거라는 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단 끝은 내야하기에 공은 계속 굴러간다.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홍대 소극장의 이름 없는 단막극 무대.

관객 없는 객석을 올려다보며 그래도 늙은 배우는 연기한다.

그게 자신의 존재 의미니까.

하늘 아래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고 자위해보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관객은 좀 많았으면 한다.

혼자인 것보다는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삶의 이유가 쓸모에 있는 것은 정말 아니지만

그래도 목표 없이 방황하는 것보다는 방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이정표가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