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수필]한파 속의 정취

in #busy7 years ago (edited)

한국인이라면 뻔히 아는 얘기지만, 연일 지독한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이윽고 추운 겨울이 되었어요, 베짱이는…’ 하고 적당히 묘사하고 넘어갈 수 없는, 형체를 가진 힘으로 두들겨 패는 듯한 추위다. ‘이윽고 천 가닥의 채찍으로 사지를 찢어 발기는 듯이 냉혹한 추위가 몰아닥쳤어요, 베짱이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동화책에 들어갈 묘사로 적합하지는 않지만, 지금 한국은 동화나라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남극 탐사대원도 서울보다 남극이 낫다고 할 지경이니 말 다했지.

예전에도 이 정도로 추웠나? 늙어서 몸이 허약해졌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추위는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며칠 내내 영하 15도를 오가는 추위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하는 질문에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토록 가혹한 추위에 떠느니 무더운 여름이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여름에는 여름 나름의 정취가 있지 않았나. 쨍쨍한 햇살 아래 우거진 초록 나무와 그늘. 이따금 산들바람이 불면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가슴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과 함께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허구고, 적어도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정취다. 이런 기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초가을이지 여름이 아니다. 즐길 만한 여름 같은 것은 한국에서 멸종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겨울이 여름보다는 낫다고 주장하고 싶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해서 영하 30도까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는 아마 여름도 영상 45도쯤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06년 여름에 겁도 없이 도쿄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정말 피부가 반쯤 녹아서 공기와 동화된 듯한 기분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지독한 고난이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방금 기어나온 망자처럼 비틀거리다 에어컨이 가동된 실내에 들어가야 그럭저럭 사람 비슷한 뭔가로 돌아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도쿄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상 45도에 습도까지 높으면 아마 그것보다 더 비참하고 끔찍한 꼬락서니가 되겠지. 어쨌든 어떤 기후가 닥쳐온대도 여름보다는 겨울이 나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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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1월, 서울의 대로를 택시가 달리고 있다)

일단 아무리 추워도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입으면 버틸 수 있다. 옷으로 모자라면 난방기구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름에는 아무리 옷을 벗어봤자 한계가 있다. 땀을 빠르게 배출해서 상쾌한 느낌을 주는 신소재가 나오곤 있지만, 추위를 피해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아, 이제 좀 살겠다’ 싶은 수준으로는 만들어주지 못한다. 지독했던 작년 여름에는 시원해지는 매트나 스카프 따위도 사용해 봤지만 이것들도 냉동실에서 꺼낸 것이 좀 천천히 녹는구나 싶을 뿐 결국에는 신통치 않게 되었다. 매트 같은 것은 그냥 땀 흡수가 안 되는 비닐을 깔고 앉은 것처럼 찝찝해지는 데다 냉매까지 열을 머금어 뜨뜻해지는 통에 짜증이 치밀곤 했다. 요는 물에 들어가거나 에어컨을 트는 것 말고는 더위를 대적할 방법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여름을 즐긴다’는 개념은 에어컨을 실컷 틀어대도 되거나, 내키는 대로 물속에 뛰어들어도 되는 환경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에 비해 겨울의 지독한 추위는 나름대로 즐길 방법이 있다. 나 혼자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는데, 한파 속으로 뛰어들 때는 모험가나 산악인이 느낄 법한 재미가 있다. 아침마다 체감온도를 확인하고 적합한 의복 조합으로 외출한 뒤 효과를 체감하는 것이다. 서바이벌 장비의 필드 테스트와 비슷하다. 어쩌면 새 장비를 맞추고 던전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매번 기후를 체크하며 의복을 테스트하다 보면 대략 몇 도에서 어떤 옷이 어느 정도의 보온성을 갖는지 눈대중이 생긴다. 오늘은 영하 10도에 멋을 낼 작정이니까 코트를 입되 안에는 폴라폴리스 집업을 입어야겠군, 신발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녀석이 좋겠지, 내일은 영하 20도에 아무도 만나지 않을 테니 패딩을 두 겹 입어야겠네, 하는 식으로. 그렇게 혹한에도 잘 버틸 옷을 골라서 맞춰 입고 밖으로 나가면 자신이 제법 경력 있는 산악인 같은 게 된 듯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애초에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런 뿌듯함을 느끼면 안 될 것 같지만, 베어 그릴스도 극한 상황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아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다만 딱 한 가지, 혹한의 추위 때문에 겪는 가장 심각한 불편을 뽑자면 역시 흡연이 있다. 니코틴을 연료로 삼는 인간인 이상 돌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가듯이 주기적으로 실외로 나가 흡연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영하 15도를 넘나드는데다 바람까지 휘몰아치는 마당에 담배를 피우자면, 고행하는 싯다르타처럼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재빨리 피우고 들어가게 된다. 이누이트가 생존을 위해 대변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본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여기에는 평소에 있던 여유도 사색도 없다. 흡연이라기보다는 체내에 니코틴을 닥치는 대로 주입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럴 거면 담배 따위 한동안 끊으면 깔끔하고 편한 인생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나도 하지만, 번뇌가 그리 쉽게 끊기는 게 아니다.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싸 체온을 지키는 것이 육체적 항상성의 발로라면, 연기와 니코틴으로 폐와 뇌를 달구는 것은 정신적 항상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코트 대신 패딩을 입는 것처럼 마땅한 대체물을 찾기 전에는 덜덜 떨면서도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나저나 어제는 날이 좀 풀리고 눈이 퍽 많이 내렸는데, 조그만 숲에 흰 눈이 쌓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옷에 쌓이는 눈을 털어가며 하얀 담배 연기를 날리자니, 이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겨울의 정취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땀을 줄줄 흘리고 장마비를 맞으며 피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2017.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