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1(금) 기자조선에 대해!
아침에 유튜브 채널에 보니
어떤 분이 진지한 투로 댓글을 남겼더군요.
기자조선이란 나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뭘 근거로 기자조선이란 말을 쓰나요.. 중국 사서가 근거라면 근거를 먼저 제시하세요.. 기자가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으면 그곳이 기자조선이 되는건가요.. 기자가 조선을 세우고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나요.. 올바른 역사의식을 먼저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고대의 땅따먹기 영상보다 이면의 역사적 진실을 먼저 추구하는 역사관을 가지지 않으면 의미없습니다.. 상고사에 한민족이 현재 중국 내륙을 모조리 점령했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요.. 역사는 땅따먹기가 아닙니다.. 중국 내륙 점령했던 수많은 이민족들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중요한것은 그 민족의 역사의식, 사상, 종교, 문화, 풍습, 언어이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역사학입니다.. 땅다먹기식 경계선을 찾는것은 그 과정의 작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죠.. 수단에 불과한 것을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인양 시청자를 오도하는 유튜버들이 너무 많습니다..(손님의 글)
뭔가 오해를 하는듯 하여 아래처럼 답을 했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것은 이미 그 용어가 일반화되고 공론화되었기 때문이지 그것의 상세한 평가를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으니 기자조선이라는 말이 있는거지요. 그리고 모든 지명은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으므로 그 위치를 논하는 것입니다. 이건 말씀하시는 땅따먹기 같은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영역과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혀서 현재의 우리가 해야하는 어떤 선택에서 기준점중의 하나로 삼을수 있는 과거사건을 소개하기 위힌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구려나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위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왜 축소되었는지의 기원과 과정을 연구합니다. 소위 역사학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있겠지만 모든 시대는 하나의 학문적관점에서 해석가능한것이 아닙니다. 특히 사회학적, 정치학적 관점이 중요합니다. 사료는 비교분석을 위한 도구이구요.
좀전에 보니 그 그 손님이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기자가 조선후에 봉해졌다는 기록 하나로 기자조선이라 하는건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이기에 기자조선은 없었다는게 한국인의 역사관이구요.. 끊임없이 기자조선을 공론화시키는것은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의 관점이죠.. 그러므로 기자조선이란 용어 자체를 사용하는건 옳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잘못된 역사관이란 것이죠.. 기자는 조선을 세운적 없고 다스린적도 없고 조선이 주나라의 땅이 아니었으므로 기자를 제후로 삼을수 없었고 기자 스스로 주무왕의 신하되기를 거부하였으므로 더더욱 기자가 조선후가 될수는 없는 것이죠.. 중국 사서조차도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왜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자조선을 말하는지.. 강단의 식민사관 추종하는 사학자들도 기자조선을 말하지 않죠.. 오로지 이씨조선 사대주의자들만이 기자조선을 말했을 뿐이고 그것을 이용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말했죠... 지금은 중국 동북공정 어용사학자들도 말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알기위해 올바른 땅의 경계점을 아는건 중요합니다.. 선조들이 어느땅에서 살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이땅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필요하죠..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알기위한 사료적 근거들은 많이 있어요.. 유적, 유물의 분포를 확인하더라도 상고시대 동이족과 예맥족의 한민족 선조들이 살았던 중심지가 어디였다는건 명확합니다.. 고인돌, 동검, 토기 등.. 만주와 한반도가 상고시대에도 선조들의 삶의 중심이었고 중국내륙(하북성, 산서성, 산동반도)와 내몽골은 변방에 불과하였죠.. 그것을 일부 문헌의 일부 기록만을 교묘하게 인용하여 마치 중국내륙이 중심지였던것처럼 일반화시키고 한민족 선조들의 중심 터전은 중국내륙이었다고 주장하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올바른 역사학이 아닙니다.(손님의 글)
그분이 뭔가 오해하는듯하여 다시 추가로 답글을 남겼습니다.
관련 영상에서도 설명했지만,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걸 부정한다고 해서 별 의미 없을거 같구요. 그곳이 유사현이며 사마천이 사기를 쓸때는 조선현이라고 불렸던 거지요. 맹자의 말대로 주나라 무왕이 노나라와 태공을 봉할때 방백리라고 했습니다. 가로세로 100리 정도의 크기입니다. 산서성 장치시에 있는 유사현이 한나라의 낙랑군 조선현이었으니 소위 한사군이 산서성 장치시 일대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위만조선의 서쪽 경계가 바로 그곳이 되는 셈이고, 나중에 고구려의 서쪽 경계역시 산서성 장치시 북부가 됩니다.
유물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발견된다고 했을때 그 의미는 현재의 생활과 다릅니다. 과거에는 이주를 할때 솥단지까지 가지고 다녔으니까요. 대륙을 지배했다는 한나라외에 요나라, 금나라, 몽고, 청나라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 단군조선이나 고구려가 대륙에 서쪽 경계를 두고 있었을 거라는 가능성은 굳이 배척하시나요?
또 일부 문헌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중심이 되어야 하는 문헌은 무엇인가요?
어느시대를 중심으로 해야 할까요? 당서?송서?요사?금사?명사?
현재 우리 역사를 언급하는사람들이 주로 인용하는 사서가 어느시대의 것인가요?
저는 은나라부터~수나라정도를 다룬 역사를 다루는 7세기 초반무렵 까지의 저작을 중심으로 합니다. 추가로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 초반까지를 상호비교하여 살펴봅니다.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것이 없으니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싸우거나 협력했던 중국의 왕조를 분석해서 추적을 합니다. 믿을만한 내용을 기록한 한국의 역사책이 있나요?
기자를 봉했던 조선현의 의미와 위치, 크기를 몰랐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어리석은 환상에 빠졌던 것일뿐, 그렇다고 해서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현에 대해 거부감부터 앞세울 필요 없습니다.
식민사관요?
그건 역사기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드는 환상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시 댓글을 남겨 놨는데 나의 취지가 잘 전달될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