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3(일)말이 되는 역사19. 한漢나라때 역사한토막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11 days ago (edited)

한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이라는 자가 있었다.
당시에 중국과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後漢書,권90. 오환선비열전]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고 흉노(匈奴)를 공격하려 하여 12부(部)의 군대를 일으키고 장군 엄우(嚴尤)에게 오환(烏桓)과 정령(丁令)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군(代郡)에 주둔하게 하고 그들의 처자식을 모두 군현(郡縣)에 볼모로 삼았다. 오환(烏桓)은 지역환경에 익숙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주둔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주 하직하고 떠나기를 청하였다. 왕망은 허락하지 않았고, 드디어 스스로 도망하여 배반하고 돌아와 노략질을 하니, 여러 군에서 그 볼모를 모두 죽였다. 이로 인해 왕망王莽에게 원한을 맺었다.

군사작전을 위해 동원했던 '오환(烏桓)'과의 갈등을 말하고 있다.
책임자가 '엄우(嚴尤)였단다.
다음 기록을 본다.

後漢書 卷85·동이열전 고구려
왕망(王莽) 초기에 구려(句驪)의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匈奴)를 치게 하였는데, 그 백성들이 가기를 싫어하여 강제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은 장수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그들을 치게 하고, 구려후(句驪侯) 추(驺)를 유인하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참수하고 그 머리를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이름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쳤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침략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같은 내용인데, 이번에는 고구려라고 말한다.
역시 책임자가 '엄우(嚴尤)'로 같다.

위의 기록은 후한서의 기록이고,
이제 우리의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 유리왕]
유리왕 31년(12년) 한나라 왕망(王莽)이 우리 병력을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자 무리하게 억지로 보내었더니, 모두 도망하여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로 인하여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하니,
주州,군郡이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결국 배반할까 염려됩니다. 〔배반이 일어나면〕 부여의 족속 중에 반드시 부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꾀어내 그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京師로 보냈다.
양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꾀어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 고쳐 이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동일한 사건의 기록이다.
왕망이 '엄우嚴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를 '구려句麗, 맥인貊人' 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동이열전 고구려편은 제목이 그러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읽지만,
오환선비라는 기록에 다른 이름으로 들어있다.
비교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다.
고구려를 '오환(烏桓)'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고구려가 오환거느리고 있었고,
오환의 병사들을 왕망에게 보냈던 것일수도 있다.
어쨋거나 고구려의 군사자원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중국의 사서에 숨어있는 우리 고대사의 흔적을 찾아내서
잘못되어 있는 역사책을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대한민국이 바로서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