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문명의 붕괴(Collapse) | 재레드 다이아몬드 3. 아나사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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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teem]문명의 붕괴(Collapse) | 재레드 다이아몬드

  1. 모아이섬
  2. 핏케언섬과 헨더슨 섬
  3. 아나사지문명과 그 이웃들- 북아메리카 남부의 문명들/ 고대문명연구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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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

위대한 문명은 왜 사라졌나



    Collapse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Collapse)』. ‘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고,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 책이다. 문명의 ‘붕괴’는 단순한 쇠락이 아닌 완전히 몰락해버린 사회들을 비교·분석한다.
  • 고려해야 할 다섯 가지 요인:
    1)환경 파괴, 2)기후 변화, 3)적대적인 이웃, 4)우호적인 이웃의 지원 중단, 5)사회에 닥친 문제에 대한 주민의 반응



재앙의  기본적 패턴

이스터 섬, 아나사지, 마야,그린란드의 바이킹





이미 황폐해지거나 밀림이 우거진 문명의 흔적에서도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지질학,생물학,역사적 기록, 과학적 연대측정이 더해지면 수천년 전의 과거가 살아난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3. 아나사지 문명

사막에서 찾아낸 것들

    나이테  

즉 400개의 나이테를 가진 나무를 베어냈는데, 그 나무에서 1643년 부터 1631년까지 13년 동안 5회의 넓은 나이테, 2회의 좁은 나이테, 6회 의 넓은 나이테가 연속된다고 해보자. 그런데 332개의 나이테를 가졌지 만 베어진 때를 알 수 없는 오래된 들보가 가장 바깥쪽에서 처음 7년 동 안 동일한 나이테 패턴을 보인다면 그 들보로 사용된 나무는 1650년 (1643 + 7)에 베어졌고, 1318년(1650 332)에 심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1318년부터 1650년까지 살았던 나무로 만든 그 들보를 더 오래된 들보들과 비교해간다. 달리 말하면 1318년 이후에 베 어졌지만 1318년 전에 심어진 나무로 만든 들보들의 나이테 패턴과 비 교해가면 나이테 분석을 통해서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농업흔적과 사냥  

옥수수는 기원전 2000년, 호박은 기원전 800년, 콩은 그 이후에 전해졌다. 목화는 기원후 400년에야 재배되기 시작했다. 남서 지역 사람들은 칠면조도 길렀지만, 칠면조가 멕시코에서 먼저 사육되 고 나중에 남서 지역으로 전래되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아니면 두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사육하기 시작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처음 에 남서 지역의 정착자들은 농업을 받아들인 후에도 사냥 및 채취를 버 리지 않았다. 아파치족도 18세기와 19세기에 농업을 받아들이면서 똑 같은 방식을 취했다. 즉 농사를 지을 계절에는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다가 그 후에는 사냥하고 채취하러 돌아 다녔다,

    팩랫 똥더미  

타버린 몽고의 스템처럼 보이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목재와 필요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을까? 그 폐허지를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은 똑같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팩랫 똥 연구 전문가인 마 반 디벨더(Tom Van Devender)가 전혀 무관한 이유 로 백랜 똥더미의 연구 보조금을 신청해서 함께 연구하지 않겠느나고 제안했다. 톰은 푸에를로 보니토근 」 국립공원 아영지에 상당한 똥더미를 이미 수집해두고 있었다.

똥더 미에서는 피니언 소나무의 침엽이 발견되었다! 피니언 소나무는 오늘 한 차코개니언 근처에서 전혀 자라지 않지만, 초기 푸에불로 보니토의 건축물에서 지봉 들보로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화덕과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는 숯도 피니언 소나무였다.

그런 똥더미들을 근거로 근처에서 소나무가 자라던 때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똥더미에서 구한 샘플들을 방사성 탄 소 실험실로 보냈다. 대다수의 똥더미가 무려 1,000년 이상 전의 것이었다! p 207

동굴속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의 똥더미는 무려 4만 년을 견딜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 는 시간이었다. 훌리오의 안내를 받아 차코 아나사지의 한 유적인 킨 클레초 부근에서 팩랫의 똥더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경외감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매머드, 거대한 몸집의 땅늘보, 아메리카 사자 등 멸종된 빙하 시대의 포유동물들이 미국 땅을 어슬렁거리던 시대에 만 들어진 똥더미가 갓 만든 듯한 보금자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카코 캐니언의 부흥과 붕괴

차코캐니언에서 훌리오는 50개의 똥더미를 수집해서 방사성 탄소로 연대를 측정했다. 600년부터 1200년까지 아나사지 문명의 시작과 몰락 까지 전(全) 시기를 포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덕분에 홀리오는 아나 사지 사람들이 차코캐니언에서 살던 시기에 있었던 식물군의 변화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산림파괴

똥더미 연구를 통해서 1000년경 인구 증가로 차 코캐니언에 닥친 두 가지 주된 환경 문제가 물 관리와 삼림 파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역 통합

삼림 파괴로 피니언 소나무의 열매가 식량원에서 사라졌고, 차코의 건축물에서 피니언 소나무 들보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판단하건대 사람들은 다른 목재를 구해야 했다. 차코 아나사지 사람들은 멀리 떨어 진 숲, 정확히 말하면 거의 80킬로미터 떨어지고 차코캐니언보다 해발 이 300미터 정도가 높은 산까지 기어올라가 폰데로사 소나무, 가문비 나무, 전나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끌 만한 가축이 없었 다. 따라서 320킬로그램에 가까운 통나무 20만 개를 산에서 끌고 내려 와 다시 차코캐니언까지 먼 거리를 끌고 가야 했다. 순전히 인력으로!

목재 출처의 후보는 캐니언에서 거의 같 은 거리에 있는 세 산맥, 즉 추스카 산맥, 샌머테이오 산맥, 그리고 샌 페드로 산맥이었다. 차코 아나사지 사람들은 세 산맥 중 어디에서 그 목재를 구했을까? 세 산맥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같은 종(種)에 속하고, 겉보기에도 똑같이 생겼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연구자는 스트론튬의 동위원소를 사용했다.

칼슘과 화학적으로 매우 유사해서 칼슘 과 함께 식물과 동물에게 흡수되는 원소인 스트론튬은 원자 무게에서 약간 다른 동위원소 형태로 존재하며, 자연계에서는 스트론튬 86과 스 트론튬 87이 가장 흔하다. 하지만 스트론튬 86에 대한 스트론튬 87의 비율은 돌의 연령 및 돌의 루비듐 함유량에 따라 달라진다. 스트론튬이 루비듐 동위원소의 방사성 붕괴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 산맥 의 침엽수들은 스트론튬 86에 대한 스트론튬 87의 비율에서 뚜렷이 달 랐다. 네이선은 차코의 여섯 유적지에서 나이테를 기준으로 974년에서 1104년 사이에 베어진 52조각의 나무 샘플을 조사했다. 그 결과에 따르 면 나뭇조각 중 3분의 2가 추스카 산맥의 것이었고, 나머지 3분의 1은 샌머테이오 였다. -아나사지 문명과 그 이웃들 p 209

사치

차고에 세워진 그레이트 하우스들의 규모로 볼때 1029년 부터 인구가 늘어났고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중앙도시를 먹여살리기 위해 외곽의 저지대마다 비가 많이 내릴 때 빗물을 저장해두려고 댐을 쌓았다. 그런 축복을 받은 곳의 사 람들은 씨를 뿌리고 밭에 물을 대서, 그 해에는 넉넉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식량은 그 해 비가 내리지 않는 다른 정착촌들 의 사람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때부터 차코캐니언은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도 밖으로 내 보내지 않는 블랙홀이 되었다.

건축을 위한 수십만 그루의 큰 나무가 들어왔고, 도기가 수입되었다. 특히 후기에 들어서는 도기를 구울 땔나 무가 부족해서 삶에 필요한 모든 도기를 수입해야 했다. 또한 돌연장을 만들기 위한 양질의 돌도 수입되었고, 뉴멕시코의 다른 지역에서 장식 품용 터키 옥도 수입했다. 호호감과 멕시코에서는 머코 야자, 조개 세 공품과 구리종(鍾) 등 사치품을 수입했다.

차코 아나사지는 작은 제국으로 변해가며 사회가 호화롭게 사는 지 배계급과 노동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역할을 맡는 농부계급으로 나누어 졌다. 도로망과 규격화된 건물들에서 그 문명의 드넓은 면적을 짐작할 수 있다.

차코와 주변 정착촌들은 경제와 문화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건물 양식에서 세 단계의 신분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차코캐 니언 내에 위치한 그레이트 하우스라 불리는 가장 큰 건물들(족장들의 거처였을까?), 캐니언 외곽에 세워진 그레이트 하우스(소족장의 '장원' 이 었을까?), 그리고 서너 개의 방을 가진 작은 가옥(농부의 집?)으로 구분 된다. 족장의 방에서는 2000개의 터키옥으로 만든 목걸이등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분쟁의 흔적

1117~1170년 베어낸 나무로 지어진 집에서부터

분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전에 없던 담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쥐를 잡아먹어야 했다.

심지어 인육을 먹었다는 증거도 발굴되었다.
차코 아나사지가 붕괴하고 1250년 이후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남서 지역의 정착지들에서는 전쟁을 점점 치열하게 벌였다.

방어벽과 해자(垓字) 및 누대가 세워졌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작은 촌락들이 모여 언덕 꼭대기 에서 요새 마을을 이루었으며, 시신을 매장조차 하지 않고 마을을 일부 러 불태웠던 것이 그 증거이다. 또한 두피가 벗겨진 두개골, 유골의 체 강(體腔)에 남은 화살촉 등도 전쟁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환경 및 인구 의 문제가 내란과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은 과거 사회 (이스터 섬)와 현대 사회(르완다 아이티 등)에서 볼 수 있다.

가뭄이 오다

차코 사람들에게 가해진 마지막 결정타는 가뭄이었다. 나이테 분석 에 따르면 그 가뭄은 113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에도, 정확히 말해 서 1040년과 1090년경에도 비슷한 가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 랐다. 차코캐니언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았고, 외곽의 정착지들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았으며, 이동할 만한 빈 땅이 없었다. 가뭄으로 지하수 면이 식물의 뿌리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가면서 영농이 불가능해 졌다. 강수에 의존하던 천수답은 물론이고 관개 시설을 갖춘 농지까지 말라버렸다.

가뭄은 3년 이상 계속되었다. 요즘의 푸에블로인들도 먹 지 못할 정도로 썩거나 벌레 때문에 기껏해야 2~3년 동안밖에 옥수수 를 보관할 수 없다는 점에 비춰볼 때 3년 이상 지속된 가뭄은 그들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전쟁

성직자들의 기도가 아무런 웅답을 받지 못하자. 정치와 종교의 중심이던 차코에 식량을 공급하던 외곽의 정착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분쟁이 발생하고 문명은 사라졌다.

사라진 옛사람들을 '아나사지' 라 칭했다. 문 자 그대로 '옛사람들' 이란 뜻이었다.
수천 명에 달했던 차코캐니언의 거주자들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닥쳤던 것일까?

1670년대에 닥친 가뭄 으로 버려진 다른 푸에블로 지역들과 비교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많 은 사람이 굶어 죽었을 것이고, 살인이 빈발했을 것이다. 이런 참극에 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서 지역의 다른 정착지로 피신했을 것이다. 앞 에서 언급한 예처럼 예기치 못한 습격에 살해당하고 먹힌 불운한 사람 들의 집에는 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에 도기를 비롯 해 유용한 물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건대 조직적인 대피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차코캐니언의 생존자들은 요즘 주니 푸에블로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피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붕괴의 원인

"차코캐니언은 인간으로 인한 환경 훼손 때문에 버려 전 것인가, 아니면 가뭄 때문에 버려진 것인가?" 라는 오랜 의문에 우리 는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을 듯하다. 즉, 두 원인 모두 때문이다!

차코 캐니언의 인구는 600년 동안 구준히 늘어났다. . 환경에 대한 요구도 를 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환경 자원이 점차 줄어들었고, 결국 사람 들을 환경이 제공할 수 있는 한계에 맞춰 살아가야 했다. 그들이 차코 캐니언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반면에 근인(近因)으로 차코 사람들을 버랑 끝까지 내몰았던 건 가뭄이었 다. 그러나 인구일도가 낮은 사회는 그런대로 전될 만한 가뭄이었다. 차코 사회는 붕괴되었지만, 차코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처럼 그 주민들은 사회를 재건해내지 못했다.

  • 이유는 간단했다.
    옛날처럼 주변에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수면도, 우곡이 없는 평지 범람원도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