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3(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혼란

우리역사는 항상 중국과 함께 했다.
국경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라고 불리는 고대의 어떤 시기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중국의 역사와 떨어져본적 없고 그럴수도 없었다.

우리는 로빈슨크루소처럼 외딴 섬나라에 살았던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중국의 역사책을 토대로 연구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멸망한 이후로
세 나라의 역사기록은 사라졌고
이후의 역사책들은 전부 중국의 역사책을 기반으로 쓰여진
억지춘향이 식의 왜곡된 것이었다.

그래서 소위 중국의 기록들을 살펴볼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어려움이 많다.

현대의 사람들은 대단한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너무나 풍요한 물질문명속에 살다보니
과거의 세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상상조차 못한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책들이
우리가 알고있는,
기록에 있는,
그 저자가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고 치자.

양수구과수구.JPG

읽어보면,

책부원구에서는< ?구> 라고 했다.

인데, 물음표를 친 글자를 보라.
이런 한자가 있는가?
이 글자를 놓고 수백년전 중국의 학자들역시 갑론을박했다.

대체 뭘까?

이건 잘못 쓰여진 글자다.
본래의 글자는 '양(량)梁'이다.
양구梁口[=양수의 입구]가 잘못 전해진 것이다.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가?
왜 그런일이 발생했을까?

최근에 읽은 중국의 연구기사가 눈에 띈다.

많은 고서들과 유사하게,
《수경주(水經注)》는 완성된 후 500여 년 동안 필사본(筆寫本)을 통해 전해졌다.
북송(北宋) 경우(景祐) 연간(1034-1038)에,
원래 40권이었던 《수경주(水經注)》는 흩어져 유실되어 35권만 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수경주(水經注)》는 여전히 40권본이지만,
이는 후대에 기존의 35권 내용을 분리하여 얻은 결과이다).

인쇄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책들은 필사본으로 전해졌고,
필사란 착오나 의도적인 수정이 있다.
특히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100% 수정이 있었다.
게다가,
11세기에 북송이 망하면서,
그나마 국가가 보관했을 역사책들은 사라지고
1~2백년 후에 겨우 조각조각 모아서 복원했던 것이다.

중국의 기록을 읽으면서 접하게되는
어이없는 오류는 바로

필사와 전쟁과정에서의 분실후 복원과정에서 발생한 것

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이래서 역사기록을 읽을 때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엉뚱한 지명과, 잘못된 위치로 기록된것이 흔하다.
많은 정보가 오픈되고 검증가능한 세상에서도
중국인들이 얼마나 황당한 날조를 하는지 알고있지 않은가?

힘이 없어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지 못하는것을 탓할지언정
적국의 선량함에 의지하는것은 바보나 하는것이다.

이런 상황을 볼때
중국왕조가 고구려, 백제에서 가져갔던 역사책과 저작물들도
이 시기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유기(留記:100권), 신집(新集:유기요약본 5권)나
백제의 서기(書記) : 일본서기의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

자기들 역사책도 챙기지 못하면서
남에나라 역사책을 챙기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