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윤용하 이야기
작곡가 윤용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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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불리는 게 수치스럽다는 포스팅을 보면서 <광복절 노래>는 그나마 별 시비가 없겠군 하며 씩 웃었다. 국경일마다 다 노래가 있지만 안익태에게 적용된 혐의를 확장해 다 걷어낸다면 남아날 노래는 그나마 광복절 노래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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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정오”의 유장한 가락을 지은 박태현이나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의 개천절 노래를 지은 김성태나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로 시작하는 제헌절 노래를 만든 박태준이나 다 친일 행각을 보인 사람들이니 요즘 분위기로 보면 싹 다 다시 지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노래는 노래일 뿐 힘 빼지 말자고 말하고 싶지만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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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노래>의 작곡가는 윤용하다. 이 사람의 노래로 유명한 건 단연 가곡 <보리밭>일 것이고 하나 더 잘 알려진 노래를 들자면 <나뭇잎배>를 들 수 있겠다. 황해도 은율 사람이고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음악 신동이라 불릴 만큼 노래를 잘 불렀고 만주로 이사 간 뒤에는 일본인 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당시의 윤용하의 모습을 성악가 오현명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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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의 보통학교시절, 나는 방과 후 학교운동장에서 공차고 노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전학해 온 낯선 아이가 운동장 한쪽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5년쯤 후 합창단원 모집광고를 보고 갔더니, 곱슬머리 친구가 피아노 반주로 지원자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바로 ‘조선합창단’의 단장 겸 지휘자 윤용하였다.”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 오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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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치하에서 조선인 합창단을 조직하고 작곡,편곡,지휘,노래 지도까지 도맡아 했다니 음악적 재능을 물론이려니와 식민지 출신 젊은이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만도 하다. 그러던 그에게 1944년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일본군에 징집된 것이다. 꼼짝없이 ‘출정 장병’이 돼 훈련소로 끌려가던 윤용하는 탈출을 결행했고 각지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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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해방 후 함흥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곧 38선 남쪽으로 내려온다. 북한의 분위기와는 영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국군의 반격을 기대하며 지은 교향곡 <개선>이라든가 오페레타 <조선의 4계>, “네가 조국을 모른다니 이게 될 말이랴.....”는 좀 낯간지러운 가사로 시작하는 <민족의 노래>라든가. 어느 해인가 문화예술계 원로가 일본말을 섞어 농담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분기를 참지 못해 술상을 엎어 버렸다는 일화를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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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조선일보에서 유일하게 존경(?)했던 칼럼니스트 이규태의 윤용하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기 그지없다. “사라호 태풍 때였다.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신문사 데스크에 노숙자 차림과 다름없는 허술한 중년 신사가 나타나 입고 있던 겉저고리를 벗어 놓고 돌아서 나가는 것이었다. 주소 성명을 묻자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며 사라졌다. 소매나 깃이 헐어 너덜너덜한 그 저고리 속 주머니 위를 보았더니 ‘尹龍河’라고 박혀 있었다. 후에 들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여분의 옷이 없어 한동안 윗옷 없이 살았다고 한다.”
수재민들을 위해 하나 뿐인 옷을 서슴없이 벗어던진 것은 그의 순수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의 삶에 대한 ‘대책없음’(?)의 표식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하나 가진 적이 없었고 나이 스무 살 때부터 소문난 주당이었다. 돈 안되는 국민 가요는 줄창 만들었으나 돈이 되는 대중음악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알려진 만큼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그 따님이 회고한 바는 있으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은 비참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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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기차에서 떨어지는 중상을 입자 병원에 입원시킬 돈이 없었던 윤용하는 안면이 있던 의사의 입원실도 없는 개인 병원에 무작정 아버지를 데려다 놓았다. 백방으로 손을 써봤지만 헛되이 임종이 가까워오자 의사는 윤용하에게 댁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는데 윤용하는 되레 역정을 낸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 판잣집 방으로 어떻게 모시라는 말이냐.” 결국 의사는 병원에 빈소를 차리고 문상객까지 받아야 했다. (의사 윤호영의 회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신세를 졌던 사람들과 자신이 얻어 쓴 푼돈들을 전부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고 한다. 아무개에게 몇백원, 아무개에게 몇백원. 언젠가는 갚을 셈이었을까. 갚지 못해도 기억은 할 셈이었을까.
<광복절의 노래>가 제정된 것은 1949년 가을이었다. 윤용하는 몇 달 뒤 광복절 기념식에서 위당 정인보가 짓고 자신이 곡을 붙인 광복절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가 울려 퍼지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50년 광복절 기념식은 열리지 못했다. 전쟁이 터졌고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해방하라.”고 독전하고 있었으니 그 해 8월 15일은 실로 비참하고 무덥고 긴박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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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는 오래도록 그 기억을 잊지 못했다. 1955년 광복절을 앞두고 학생들과 광복절 기념식 연주를 위한 합숙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복절 노래의 작시자이신 위당 정인보 선생의 6.25 사변 당시를 회상하게 되고 그 후에 어떻게 되시었는지 마음이 뼈저리게 아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경향신문 1955년 8월 14일) 정인보는 납북인사 명단에 올랐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북한에 따르면) 폭격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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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 <보리밭>은 1951년 늦여름, 피난 수도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다방 밀다원, 이중섭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이고 김동리가 <밀다원시대>를 묘사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윤용하는 작사가 박화목에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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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틈 바구니에서 자라는 청소년을 위해서 정성이 듬뿍 깃든 가곡을 만드세. 전쟁 중 서정 가곡을 작시 작곡해 낸다면, 이건 정말 역사에 남을 희한한 일 일거야.” 만주에서 조선인 합창단을 조직할 때나 가톨릭 청소년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 때나, 새세대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그답게, 그의 대표작 <보리밭>은 ‘자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정성이 듬뿍 담긴’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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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의 월남민답게 반공 정신이 충만했던 그는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 찬가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바쳐오신 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대통령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김일성 장군의 노래 찜쪄먹을 기세의 이 노래는 50년대 각급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불렸다. 혹자는 가난 때문에 권력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돈 되는 음악을 애써 외면했던 윤용하를 돌이켜 볼 때 오히려 자발적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말고도 그런 사람들은 무척 많았고 4.19로 내쫓아 놓고도 이승만이 죽은 뒤 거창한 장례식이 열렸던 역사를 떠올려 보면 납득이 가는 상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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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날 광복절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의 짧은 일생을 돌이켜 봤다. 향년 43세. 1922년에 태어나 1965년에 죽었다. 그 안타까운 인생에도 엄청나게 많은 역사들이 배어들고 얽혀들고 깃들며 삐져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74주년. 정인보가 짓고 그가 곡을 만든 광복절의 노래 2절을 읊조려 본다. 나도 처음 봤으니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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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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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에 방콕하니 잡생각만 그득하네
이번 글도 역시 깊은 인상을 주시는군요. ...찜쪄먹을..... ㅎㅎ윤용하도 이승만의 숨겨진 모습은 보지 못해서 그랬나봐요.